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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 '제6회 2024 판놀음 별별창극'국립민속국악원(원장 김중현)은 '제6회 2024 판놀음 별별창극'을 25일, 29일, 6월 1일(토), 6월 8일(토)에 국립민속국악원 예원당에서 개최한다. 이번 공연은 국립민속국악원의 창극 특성화 전략의 일환으로, 다양한 창극 작품을 통해 전통 판 문화를 부활시키고 문화적 다양성을 확대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 공연은 네 차례에 걸쳐 다양한 창극 작품을 선보인다. 5월 25일에는 소리뮤지컬 '이도'(연출 박선옥)를, 5월 29일에는 가족연희극 '용을 쫓는 사냥꾼'(연출 박헌용)을 만날 수 있다. 이어서 6월 1일에는 판소리음악극 '정조가-어떤 왕 이야기'(연출 박정봉), 6월 8일에는 판소리음악극 'SHE: 그녀들의 이야기'(연출 승은)가 공연될 예정이다. 5. 25.(토) 오후 3시 선보이는 소리 뮤지컬<이도> 세종의 위대한 업적 뒤에 가려져 미쳐 보이지 않았던 인간 이도의 고뇌. 이도는 밤마다 아버지 이방원이 나오는 악몽을 꾼다. 아버지가 칼로 일군 조선에서 어떠한 왕이 될 것인가를 고민한다.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겪는 백성의 사연을 듣게 된 이도. 그 길로 저잣거리에 나가 자신이 찾아 헤매던 팔딱팔딱 살아있는 말을 듣게 되지만 글이 없어 고통받는 백성의 모습을 목격하고 절망하게 된다. 이도는 백성들을 위한 한글 차제를 서두르는데 또다시 꿈에 나온 아버지가 이도를 꾸짖는다. 아버지는 글을 알게 된 백성이 왕권에 도전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도는 이에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어느새 왕의 아들이 아닌 온전한 왕이 된 자신의 두려움과 마주한다.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백성을 힘으로 누를 것이냐, 백성과 힘을 나눌 것이냐. 새로운 조선은 이도의 손끝에서 만들어질 것인가. 백성들은 칼 대신 마음을 내미는 이전과 다른 왕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도> 이야기를 통해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사회에 숨어있는 신분에서의 평등한 관계, 가족 간의 사랑과 화목 등 시대를 초월한 공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5. 29.(수) 오후 1시 30분 가족 연희극<용을 쫓는 사냥꾼> 용을 잡아 큰 부자가 되려는 사냥꾼들과 능청스러운 용의 속고 속이는 황당 모험기. 옛날 어느 평온한 마을에 사냥꾼들이 들이닥친다. 스무 명이 넘는 자식을 키우고자, 장가갈 밑천을 마련하고자, 노부모와 늦둥이 동생을 부양항고자, 서당을 나와도 일할 곳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각자의 사연을 지닌 주인공들이 아무도 잡지 못한 용을 잡아 부자가 되어 팔자를 고쳐보겠다며 용을 찾으러 떠난다. 용이 산다는 마을에 도착한 사냥꾼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며 용을 찾는다. 그러던 중 한 친절한 한량이 나타나 사냥꾼들을 이끌며 함께 용을 잡자고 제안한다. 사냥꾼들은 사투 끝에 용을 잡아 시장에 팔려고 하지만 용은 마을에 비를 내려주고 전염병을 막아주는 고마운 존재이기 때문에 용을 도살하면 마을의 농사와 주민들이 곤란에 빠질 위기에 처한다는 사실을 알고 고민한다. 마을 사람들은 사냥꾼들에게 용을 풀어주도록 요청을 하고 용은 고민하는 사냥꾼들에게 함께 용을 잡으러 여행을 떠나자며 솔깃한 제안을 한다. 과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가족 연희극 '용을 쫓는 사냥꾼'은 한국의 서사와 전통 요소들을 바탕으로 모험, 공동체, 인간과 용의 공존이라는 한국적 판타지 세계를 공연에 담아보고자 창작하였다. 전통연희, 판소리, 구전노동요, 연극적 요소 등 다양한 볼거리를 통해 색다른 즐거움을 전하고자 한다. 6. 1.(토) 오후 3시 판소리 음악극<정조가-어떤 왕 이야기> 개혁군주 정조 이산이 그리던 세상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조선 제22대 임금이자 화성행궁을 축성한 개혁군주 정조가 그리던 세상과 사랑했던 여인 성덕임에 대한 이야기로 판소리의 연극적, 음악적 특성에 현대음악을 더해 창작한 판소리 음악극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부터 임금으로 즉위하는 순간까지 존재 자체의 위협을 받았으나 즉위 이후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해 왕권을 강화하고 탕평정책을 추진하여 정치를 안정시켰다. 그 밖에도 지방인재 및 시얼의 등용 등을 추진하였고 화성행궁 축성, 현륜원 행차로 개혁의 방점을 찍으려 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개혁은 역사 속으로 퇴장하게 되었다. 작품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조의 즉위를 굿 형식으로 담아낸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대목과 더불어 의빈 성씨 성덕임과의 사랑과 이별을 그려낸 '외로운 정조', '무정하게 흐르는 마음 유정할 곳 하나없네', '허망하게 떠나가네' 대목을 비롯해 정조의 정치적 소신과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정유역변', '왕 노릇', '탕평' 등 총 열한 개 대목으로 구성됐으며 앞서 열거한 정조의 위대한 업적 이면의 조금 더 인간적인 이산을 만나볼 수 있다. 6. 1.(토) 오후 3시 판소리 음악극<SHE: 그녀들의 이야기> 시대의 상징이 된 역사 속 여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전주판소리합창단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판소리에 합창을 접목시키는 콘셉트로 다양한 무대를 통해 대중들에게 우리 소리를 보다 친근하게 선보이는 단체이다. 오랜 시간 전주판소리합창단이 관객들을 만나왔던 판소리의 주요 요소인 창, 아니리(말:대사), 너름새(몸짓:움직임과 무용) 등의 무대 언어를 보다 적극적으로 더하여 만들어 낸 작품이 <SHE: 그녀들의 이야기>판소리 음악극이다. 춘향, 논개, 진채선, 정읍사의 무명의 여인, 그리고 매창이 저승에서 자신들의 환생을 거부하고 소멸을 택하게 되는 전개로 이어지는 이 작품은 이승과 저승의 각각 다른 차원의 시공간을 다른 언어로 구현한다. 같은 뜻을 가진 언어일지라도 각각의 다른 지역과 문화권에서 문자, 발음 등을 갖게 되고, 이것은 그 지역 사람들의 사유나 인식 체계, 나아가 그 지역의 문화와 관습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작품 속에서 우리는 '소리'를 주요 인물들의 무대 언어로 표현한다면, 저승의 언어는 현대무용을 활용하여 표현한다. 각 공연은 60분에서 100분가량의 다채로운 무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토요일 공연은 오후 3시에, 수요일 공연은 오후 1시 30분에 시작한다. 다양한 창극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창극의 매력과 깊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석 무료, 국립민속국악원 누리집, 전화(063-620-2329)예매 가능. 국립민속국악원 이종혁 공연담당자는 "이번 공연을 통해 전통문화의 가치와 창극의 매력을 널리 알리는 동시에, 민속예술의 활성화와 대중의 문화적 향유를 도모하고자 한다”며 또한, "지역사회의 문화 활성화와 전통 공연 예술에 대한 관심을 높여, 관객들에게 잊지 못할 문화 경험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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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연의 경기소리 숨, ‘절창 정선아리랑!’# ‘이호연의 경기소리 숨’ 공연이 지난 4월 26일 삼성동 민속극장 ‘풍류’에서 열렸다. 20대에서 60대까지의 제자들 20명과 5명의 반주자와 함께 경기잡가, 경기민요, 강원도민요, 아리랑모음, 이렇게 4개 종목 13곡을 선보였다. ‘2024 국가무형문화유산 전승지원 기획공연인 만큼 경기12잡가 중 선유가·제비가·영변가 3곡은 일종의 보유자가 계승해야 하는 의무 곡인 셈이고, 나머지 경기민요를 비롯한 강원도 민요와 아리랑 모음곡은 제자들의 전승 실상을 보여주기 위한 선곡인 듯하다. 이 중에 이호연 보유자와 전승자들이 함께 전해준 소리는 12잡가 중의 '선유가'와 '영변가', 그리고 경기민요 '노랫가락'이다. 그리고 보유자가 독창으로 부른 것은 12잡가의 하나인 제비가와 강원도민요 정선아리랑·한오백년·강원도아리랑, 이렇게 4곡이었다. 이 중에 관객의 반응이나 보유자의 목성대로 구사하여 자신도 만족스로운 표정을 보여준 것은 단연 '정선아리랑'이었다. 이 정선아리랑은 보유자의 10여 종에 이르는 음반 대부분에 수록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공연에서도 빼놓지 않는 곡이기도 하다. # 정선아리랑은 대체로 경기민요 소리꾼들이 선호하는 곡이다. 전국아리랑경창대회에서도 명창부가 선택하는 대표적 소리이다. 그러나 누구나 부를 수 있다고 해서 누구나 잘 부르는 소리는 아니다. 그 이유는 시인 신경림 선생의 다음과 같은 감상평에서 짐작할 수가 있다.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은 내게는 노래이기 이전에 내 정서의 깊은 샘”이라고 했다. 곧 한국의 정서를 담고 있는 소리로서, 이 정서를 표현해 내지 못하면 ’정선아리랑‘이 아니라고 한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것으로 보이는데, 유튜브 매체를 통해 한 서양음악 전공가의 고백도 마찬가지다. "독일과 유럽에서 30여 년 서양 고전음악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을 듣고 한참을 운 적이 있다.”라고 한 것이 그렇다. ‘김옥심의 정선아리랑’, 이 소리는 한국전쟁 말기 당시는 강원도였던 이천 지역에서 있었던 ‘육군예대’(성경린 단장) 공연에 갔다가 ‘정선 아라리’를 듣은 이창배 선생과 김옥심 선생이 돌아와 다시 짜 불러 알려진 소리이다. 이런 탄생 배경은 생전 이창배 선생의 후원자였던 전 종로문화원 반재식 원장, ‘종로 국악로 지킴이 김뻑국 선생’의 증언이 있고, 명고(名鼓) 장덕화 선생이 김옥심 선생과 친했던 명창 이은주 선생에게서 직접 들었다며 필자에게 전한 말로는 거의 일치한다. 이런 연유에서 음반을 통해 확인되는 정선아리랑은 네 가지 버젼이 존재한다. 전주(前奏)와 간주(間奏)의 유무, 대표사설을 "강원도 금강산~”으로 한 것과 "네 칠자나 내 팔자나~”로 한 것 등이 있기 때문이다. ‘김옥심제 정선아리랑’이라고도 하고 ‘경기제(서울제) 정선아리랑’이라고도 명칭을 하는 이유인 것이다. 절창(絶唱), 이 말은 ‘다시 없는 명창’ 또는 ‘비할 데 없는 뛰어난 노래’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빼어난 노래이기도 하고, 빼어난 명창을 이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정선아리랑은 절창이다”나 "김옥심은 절창이다”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흔히 김옥심을 ‘하늘이 내린 소리’(La Voix Celeste) 또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명창’이라고 한다. 특히 그 목을 말하면서는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 같은 표현은 거의 ‘정선아리랑’을 말할 때 동반되는 수식어이다. 그래서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은 절창이라는데 이의가 없는 것이다. 필자의 단견으로는 동시대 명창들 간의 경기민요 절창은 이렇게 본다. 묵계월은 ‘한오백년’(CD 경기민요의 향연), 안비취는 ‘이별가’, 이은주는 ‘긴아리랑’, 김옥심은 ‘정선아리랑’(오아시스 레코드 1476 경기민요 2집)이라고 본다. 이 네 분의 경기민요 4곡은 가히 다른 소리꾼들이 그 정서를 그만큼 표현해 내기는 쉽지 않을듯싶다.(그 원인의 하나로는 이들 소리가 성창(盛唱)된 시기로 보아 한국전쟁의 민족적 수난이란 정서가 반영된 것을 들기도 한다.) # ‘2024 이호연의 경기소리 숨’, 이호연도 정선아리랑도 절창이다. 이호연의 활동 이력이나 수상 경력은 누구 못지않게 화려하다. 그러나 그가 해낸 공연과 음반 취입과 방송 출연 레파토리 이력을 꼽아보면 알 수 있다. 매우 실험적이었고, 파격적이기도 했다. 공연으로는 1999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의 ‘통일의 소리 옥피리’ 초연을 들 수 있다. 이 공연 메세지는 야심찬 ‘밀레니엄 프로젝트-’한국의 소리가 바뀐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전공 종목으로 전체 국악판을 견인하겠다는 뱃심은 경기 소리꾼으로서의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지 않고서는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음반 발매로는 2015년 발매한 광복 70년 주년 기념 발매 ‘통일아리랑’이 있다. 리딩통월드 오케스트라와 어린이 합창단을 동원한 음반이다. 이는 ‘분단 70년 남북 이산가족 예술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공연으로 전환해 4년간이나 지역 순회공연을 한 원천이었다. 국악인으로서 민족문제를 자신의 소리 주제로 반영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창작 작품을 취입, 발매하는 기획력이나 경제적 여유만으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나름의 시대정신과 소명의식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어 2008년 취입, 발매에 이은 ‘이호연 唱 경기12잡가’ 음반과 악보집을 2021년에 내놓았다. 경기민요 전승 능력과 전수 활동의 최종 결정체를 내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경기 12잡가 전승자로서의 의무감과 그간의 전수활동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있다. "우리 세대의 역할이 무형문화재 1세대 스승님들의 예능 원형을 보존, 계승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교육 과정에서 갖춘 지식을 기반으로 앞 세대에서 보존, 계승한 원형을 연구해 경기소리의 유래와 유형을 밝혀 학문으로서 정립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는 음반과 악보집의 신뢰를 담보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드디어 그 화려한 이력의 종결판을 확보했다. 지난해 국가무형유산 경기민요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은 사실을 말한다. "국가 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종목의 전승능력, 전승환경, 전수활동 기여도 등의 탁월”함을 인정받은 결과이다. 1968년 이창배, 정득만 선생 사사와 1970년 안비취 선생 경기민요 전수, 1984년 제10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민요부문 장원으로 기량을 인정받고 활동. 다소 늦은 67세에 보유자 인정을 받았지만, 그래서 더 빛을 발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민속극장 ‘풍류’에서의 ‘이호연 경기소리 숨’ 공연은 전체적으로 깔끔했다. 해설이 다소 밋밋했고, 음향이 너무 커서 앞자리에서 듣기에 불편한 정도 외에는 그렇다. 그러나 이 무대를 더욱 빛내준 것은 단연 보유자의 독창 ‘정선아리랑’이다. 이 소리는 1979년 한국음반의 ‘한국고전민요 제3집’(안비취 이은주 묵계월 3인 녹음)까지의 전주 형태 버젼이다. 1995년부터 연주되는 목탁소리와 합창의 인트로 버젼이 아니다. 이 버젼은 처음부터 감정을 고조시켜 다소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은데, 원래의 버젼은 후렴을 먼저 부르고 "강원도 금강산~”으로 시작하여 온전히 정서를 수용할 수 있게 하는 버젼이다. 보유자의 이번 정선아리랑은 원래의 버젼 그대로이다. 보유자가 부른 정선아리랑은 두 번째의 독창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은 중반쯤의 무대로 관객들의 호응은 준비된 상태였다. 여유와 관록이 배인 자태였다. 첫 음도 그렇고 전체적 요성(搖聲)이 매우 안정적이었다. 고음이 보유자의 특징으로 매우 청아했다. 사설의 해석도 담담하여 오히려 전달이 쉬웠다. 보유자에게 따르는 목성 평가, '청아 담백'이 충분히 전달된 정선아리랑 무대였다. 절창, 이호연, 그리고 정선아리랑! 그 여음이 오래갈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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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 2세가 부르는 서러운 아리랑사할린한국교육원장 3년간 업무를 마치고 귀임한지 1년이 지났지만, 사할린 동포들의 서러운 처지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코로나 시절 함께 불렀던 아리랑 선율에 따라서 부른 개사한 노래를 불러본다. 교육일지와 사진 속에 있는 사할린 동포 2세들의 얼굴들을 떠 올려본다. 사할린 한인 2세의 간절한 소망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국문화 수업을 함께하면서 이분들의 간절한 소망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동포들의 뼈져린 한은 영주귀국으로 조국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형제들을 만나는 것이다. 한국으로 가신지 30년이 지나고 이미 영주귀국 후 연로하신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2세대 자녀 한명과 그 배우자를 영주귀국 대상으로 확대되었다.(2021년) 그 이전까지는 풀릴 기미가 없이 가슴 아프게 지속되었다. 1세대 부모가 사망한 2세대 자녀들에 대해서는 현재 법적으로 영주귀국이나 귀환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국적 취득에 관한 속지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어려서부터 한국어를 말하고 쓰고 배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이 술김에 흥얼거리는 아리랑이나 민요 가락을 들으며 자랐고, 한국의 전통 풍습과 명절을 쇠었으며, 조선에서 가져 오거나 사할린에서 만들어 쓴 조선의 생활물품을 늘 보고 쓰며 아버지, 어머니 따라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어린시절, 청소년 시절, 냉전의 시기를 살아 왔다. 해방 후 냉전 시기에 사할린 한인들은 억류되어 감시 당하며 사회주의 소련땅 사할린의 노동력을 보충하는 신분이었다. 이동과 취업, 인간으로서의 권리적 측면에서 차별과 멸시는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과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대한민국의 발전상이 보도되면서 급격히 사할린 한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었지만, 어린 시절 당했던 차별과 수모에 대해서는 늘 대화의 끝에 "정말 숱하게 멸시를 받았어." 하시며 푸념하듯 말씀하시곤 했다. 오죽했으면 한인 2세대인 사할린태권도협회 안수학 회장은, 어린 시절 차별과 수모에 반대하여 싸움을 자주 했고, 김치 냄새난다고 놀리는 러시아 아이들 혼내주고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가라테를 배웠으며, 한러수교 후 태권도를 다시 익혀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국적을 러시아로 바꾸지 않고 평생 무국적으로 살다가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대하고 있었고 2세대 자녀들은 귀환을 믿으며 굳건히 당당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냉전과 사회주의 시절을 살다가, 한국의 발전상이 사할린에 알려지고 사할린 한인의 존재와 귀환의 문제가 공영방송을 타면서 국내에도 알려졌다. 사실 한-러 수교 이전에도 KBS사회교육방송(현재 한민족방송)에서는 사할린 한인동포들이 고국의 친지에 전하는 사연들이, 일본으로 이중징용 되어 재일동포가 된 지인을 통해 전달되어 방송이 되곤 했다. 그러나 첨예한 냉전 시기에 관심도 지원도 교류도 불가능한 시기였다. 1990년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후 고국방문이 이루어질 때 한국에 다녀오신 1세대 부모들이 많았다. 그러나 영주귀국 희망 신청이 이루지던 결정적 시기를 맞이하기 전에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들이 참으로 많다. 그 시기에 생존해 계신 1세대분들은 영주귀국을 희망하고 신청하여 고국에 오셨지만, 사망하신 1세대분들은 영영 통한의 그리움 안고 타국 땅에서 숨을 거두고 그 섬에 묻히셨다. 사할린에 징용되었다가 일본으로 다시 이중 징용된 1세대 부모를 둔 2세대 자녀들은, 알음알음 정보를 얻어 일본의 한 공동묘지에서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기도 하였다. 이 얽히고 설킨 일제 강제징용과 식민시대의 압제와 희생, 그리고 조국으로부터 외면 당한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이분들에겐 실로 삶 전체가 버겁고 서러운 현실이다. 나는 어떤 영향력을 가진 위치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영주귀국 확정 전에 부모를 잃은 2세대 분들의 원한을 내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보고 가슴에 간직하게 되었다. 사할린 동포 지원 특별법에 "사망 등 다양한 사유로 영주귀국 신청을 하지 못한 1세대 동포들의 자녀들에게도 희망에 따라 영주귀국의 기회와 모국인 대한민국의 국적 취득이나 경제적 지원의 혜택을 드릴 수 있는 방안" 을 모색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범위의 2세대 분들 중에는 현 러시아 정부의 연금을 수령하는 분도 있고, 홀로 사업을 일으킨 분도 있으며, 이미 사할린 사회에 인정을 받은 문화 예술 공로자도 많다. 대한민국으로 영주귀국한다면 자녀들과의 이별을 두려워하는 분들도 많다. 따라서 그런 범위의 모든 2세대 분들이 영주귀국을 희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국이 풀어주지 못한 부모의 원한을 보며 겪으며 성장하고 기억하는 자녀들의 소망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조국에서 살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사할린 한인 2세의 고통과 설움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사할린한국교육원과 유치원에서 25년간 한국어를 가르치시다가 2021년 영주귀국 신청으로 한국에 오신 2세 전영희 선생님은, 어머니가 2004년 병환 중에 영주귀국을 하셨지만 대한민국 국적이 나오기 전에 병원에서 사망하셔서 한국 국적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니 전영희 선생님은 영주귀국 대상이 될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영주귀국 하시는 1세분과 재혼을 하여 배우자 자격으로 2021년 11월에 영주귀국을 하셨다. 그러나 배우자께서 역시 국적 취득 전에 별세하셔서 국적이 나오지 않아 애태우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화가 난다. 영주귀국 하신 분이 돌아가시면 사후에라도 국적을 드려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래야 자녀에게도 법적으로 고국에서 살아 볼 기회가 생길 것 아닌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에 오셨는데 남편이 국적을 받기 전에 별세하여 배우자의 국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아내는 다시 돌아가라는 것인가. 너무나 법 적용이 허술하고 냉혹하다. 유독 사할린 한인, 사할린 동포들에게 더 냉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1세 부모를 모시기 위해 영주귀국 허용된 2세 분들 중에는 한국어에 서툰 분들이 많고 일상 생활, 행정적 처리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 고국 정착 과정에 난제와 장벽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래서 사할린한국교육원의 한국어 교재를 다시 가져와 드린 적이 있다. 정착 지원 체계가 아직 자리 잡히지 않아 각자도생 해야한다는 말이 나왔다. KBS한민족방송이 주관하는 한민족체험수기대회에서, 2021년(사할린아리랑무용단 박영자 단장), 2022년(유즈노사할린스크 김경순) 성인 부문 대상을 모두 사할린 2세대 한인 어르신이 수상하셨다. 2021년 수상자 박영자님은,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다시 이중징용 되셨다가 끝내 일본에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인사드리던 기막힌 디아스포라가 담긴 가족사를 글로 남겼다. 수상 인터뷰에서 "KBS가 주는 이 대상은 우리 가문의 영광이기 전에 사할린 한인 전체에 주는 상"이라며 "사할린에서 다시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으로 끌려가서 타국에 묻히신 외할아버지께 이 상을 바친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하셨다. 2022년 수상자인 김경순님은 아버지에 대한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90년대 중반 병든 노부모가 한달 간의 모국방문에서, 50년 만에 아들과 상봉 후 다시 이별하여 사할린에 돌아와 몇 개월 만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끝내 영주귀국 신청을 해보지 못한 서러움에 관한 처절한 가족사의 이야기를 쓰셨다. 특히 김경순님은 한국교육원 한국문화 수업시간에 배운 가수 조용필의 노래(그 겨울의 찻집)와 주병선의 노래(칠갑산) 가사를 바꿔 부모에 대한 기억, 조국 귀환에 대한 부모의 열망, 부모님과 10살 아들(김경순님의 오빠)과의 이별 장면 등을 가사에 담아 내게 보내셨다. 그 노래를 노래방 반주에 맞추어 불러 보았는데, 부르다가 여러 번 가슴이 메이고 눈물이 터져 한참 후에나 완전히 부를 수 있었다. 그 노래 영상들을 김경순님께 내가 보냈고 김경순님은 한국의 조카들(큰 오빠의 자녀)에게 보내 드렸다고 한다. 그러면 조카들로부터 아버지 어린 시절을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고 한다. 박영자님의 외할아버지 이야기와 김경순님의 부모님과 오빠에 대한 사연은, ㈜국악신문과 새고려신문과 ‘우리말방송’에도 게재되고 방영되었다. 김경순님 사연은 KBS한민족방송에서도 사할린과 전화로 연결하여 소개되기도 하였다. 나도 방송에 출연하여 사연과 노래 가사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소개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사할린 동포, 사할린 한인 1992년부터 시작된 사할린 동포 1세대의 영주귀국 사업으로 현재까지 4,700여 분이 홀로 또는 배우자와 함께, 그리고 2021년부터는 '이미 한국에 사시는 부모님'의 2세대 자녀 1인과 배우자가 한국에 영주귀국하여 사신다.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으로 강제징용되었거나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들을 ‘사할린동포’라고 정의한다. 이분들이 영주귀국이 허용된 사할린 동포 1세대이다. 따라서 사할린에서 한 집안이나 동네에서 자란 언니, 동생, 친구라도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영주귀국 지원 혹은 희망과 신청 대상이 되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영주귀국 사업 개시 당시 생존하는 1세대 한인에 한하여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신청 및 허용 대상이 되었다. 이 글은 영주귀국 사업과 신청이 이루어지기 전에 사망하거나 기타 사정으로 영주귀국 신청을 할 수 없었던 부모를 둔, 2세대 사할린 한인 자녀들의 간절한 소망에 관한 것이다. 이분들은 2024년 현재 연령상 60대 후반에서 70대 중반에 이르신 분들이다. 조국 귀환의 기회를 누리지 못한 불쌍한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통절한 한을 품은 채 살고 계시다. 어떻게든, 그렇게도 부모가 돌아가고 싶던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계시다. 영주귀국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대한민국 국적 취득을 하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절차가 너무나 어렵다고 한다. 이런 점을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2020년에서 부터 3년간 한국문화교류가 단절되는 시기 필자는 임시 탈춤강습과 탈만들기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국립사할린대학 한국어과 학생들과 사할린아리랑무용단 단원들에게 탈춤 기본 춤사위를 지도했다. 우리 민족은 어디를 가나 노래방이 있듯이 러시아는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사교댄스나 스포츠댄스 모임이 많다. 아마도 죽을 때가지 춤을 추다가 간다고나할까. 동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실버댄스 동아리에 들어가서 함께 춤을 배우기도 했다. 그들에게 탈춤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렇게 동포들과 가까이 만나게 되면서 사할린 한인들의 이산에 대해 4대 가족사를 접하게 되었다. 특히 댄스 클럽에서 만난 오석만씨가 KBS한민족방송에서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2023년 우수상을 수상했다. 처음에는 누구나 한국어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들의 가족사는 바로 잊혀진 한국사이고 동아시아 전쟁사라는 나의 설득에 용기를 내서 슬픈 가족사를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책으로 묶여 나와서 보내드리게 되었다. 한국교육원 수업에서 한국어 수업이나 한국문화 체험 프로그램에서 만난 한인들이 과제물로 내 놓은 체험수기 중 우수한 작품이 KBS한민족체험수기에서 매년 대상과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경순님은 한국교육원 수업에서 ‘그 겨울의 찻집’ 노래를 배우신 후 ‘눈물의 섬, 사할린’으로 가사를 정셨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가사 중에 특히 "사무친 한을 풀어 주세요."는 대한민국에 외치는 절규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서러운 아리랑 사할린으로 끌려 왔어요. 조선 땅에서 그 옛날 일본 놈들의 시달림 받고, 늘 괴로움에 떨었죠 가고픈 고향 한국 땅으로, 부모형제 사는 마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 한숨만 저절로 나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리워라 내 고향 사모친 한을 풀어 주세요, 하루 속히 날아 가고파 그늘진 세월, 고향 그리며, 철천지 한이 되었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꿈에서 본 내 고향 그리고 ‘칠갑산’ 노래의 곡조를 생각하면서 부모와 이별하는 어린 10살의 오빠의 심정을 감정이입하여 지은 ‘’ 가사는 이러하다. 이별의 부두 부모 잃은 어린 마음을, 그 누가 알아 주리요 외로웁고 서럽던 아픔, 누구에게 원망 주리요 어머니는 내게 같이 떠나자, 애닯게 속삭였지만 할아버지 무서워 끝내, 따라간다는 말을 못했소 어머니가 나를 두고 떠난 날, 배 떠난 부두에 나가 하염없이 목 놓아 울었다오.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또 김경순님은 아리랑민족의 후예로서, 부모님과 큰오빠의 오십년 이별과 한번의 만남, 또 이별과 사별의 한, 전체 사할린 한인동포들의 고통의 역사를 담아 아리랑 가사로 쓰셔서 내게 보내셨다. 적절한 아리랑 곡을 찾아 보았는데, BTS의 아리랑이 긴 가사를 모두 담을 수 있었기에 노래로 불러서 보내 드렸다. 도중에 여러 번 목이 메었다. '한맺힌 사할린 아리랑'을 정리한 가사는 이러하다. 한맺힌 사할린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일제에 끌려 사할린 왔소. 모질던 징용살이 누가 아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간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믿음에 살아 낸 세월 [랩 버젼] 한달만 있다가 돌아간단 그말, 어찌나 기다렸는지. 밤이면 라디오 틀어 놓고서 혹시나 우리를 찾을까 봐. 애타게 기다린 자식 형제들 오십년 넘어서 만나보네. 수십년 세월을 참아 왔는데 언제 또 고향 땅을 밟아보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기다리다 지쳐 세상 뜨신, 우리네 부모님들 불쌍하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 넘어간다. 부모들 사모친 한 생각하면, 애타던 자식들도 가여워라. 너나없이 서럽고 아파 어이하오. 이 가사의 핵심은 부모와 어린 오빠가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친 것, 그런 가엾은 부모를 보는 자식들 모두 차마 맨 정신으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가엾다는 점이다. 영주귀국의 기회가 오기 전에 돌아가신 불쌍한 부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진다. 부모님의 나라에 더 가까이 가고 싶은데 도무지 소식도 없고 희망을 찾을 수도 없다. 이 아리랑의 마지막 가사들은, 그렇게 부모를 잃고 조국과 단절된 채 희망을 잃은 사할린 한인 2세대 자녀들의 심정을 그대로 외치는 절규다. "(조국 귀환을) 기다리다 지쳐 세상 뜨신 우리네 부모님들 불쌍하오 부모들 사모친 한 생각하면 애타던 자식들도 가여워라 너나없이 서럽고 아파 어이하오 2023년 9월에는 ㈜국악신문사(대표이사 기미양)를 통하여, 아리랑 무용단장 박영자님(갈리나 박)의 아리랑 가사를 받았다. 박 단장님 역시 일찍 부모를 잃고 영주귀국의 희망이 사라진 심정과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마음 속의 조국에 대한 이미지와 당신의 현실에 대하여 "사할린 2세 아리랑"라는 재목을 달고 가사를 지으셨다. 아리랑 반주를 확장하여 가사를 붙여 서울의 사무실에서 불러 보았다. 사할린 2세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는 사할린 2세 한인 할머니, 하지만 부모 조국은 한국이라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 어릴 때 저 산 너머엔, 내 조국 있다고 믿었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팔십 년 세월 부모 잃고 서럽구나, 나도 이제 주름진 할머니로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말문 터진 손주들 자주 묻는 말, 할머니와 조국에서 살 수는 없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발전되어 잘 사는 우리 조국 한국, 우리에겐 자랑스런 마음만 크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언젠가 이 생명 끝나기 전에, 조국 품이 우리 2세들 안아 줄까 한인 2세, 우리는 누구인가요 어릴 적부터 조국의 존재를 믿고 한국어, 한국문화로 정체성을 지켜 왔지만, 영주귀국 신청 시기 이전에 부모를 빨리 여의신 사할린 한인 2세 어르신들의 심정은 한결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한국을 조국으로 선택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당신들께도 주어지면 좋겠다는 것이다. 설령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사할린 사회에 뿌리박은 삶의 터전을 옮기는 문제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자녀들과의 이산, 다른 친지, 친구들과의 이산을 의미하며 기존의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는 연금의 상실과 영주귀국 후 생활보호대상자 신분으로서의 생활 등 수많은 심적 갈등 상황이 존재한다. 그러나 조국이 부모의 한을 풀어 준다는 기본적인 정책의 도리와 그로부터 받는 부수적 혜택이면 충분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신들의 국적 취득이나 자녀의 유학이나 체류 등에 있어서 유연함 같은 혜택일 수 있다. 엄연히 식민지 시기 타국으로 강제동원된 국민들의 자손이 아닌가 말이다. 2021년 10월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탈레반 정권에 항복하여 붕괴되던 시기, 그간 한국 정부에 기여한 아프가니스탄 국민과 가족들을 우리 특수부대를 투입하여 목숨을 걸고 안전하게 데려온 미라클(기적)의 작전이 있었다. 그러한 쾌거는 우리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한국 정부의 도덕성과 형제애 및 인류애를 상기시킨다. 그런 인류애와 형제애를 지닌, 정의로운 나라가, 강제로 희생된 일제침략기의 혈육과 자손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또한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의 적용으로 인해, 명백한 국적 회복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 상황(영주귀국 후 국적 취득 전 사망하신 경우)에서 비인륜적으로 국적을 부여하지 않아 그 자녀들의 기회가 방기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법의 취지를 저버리는 일이다. 법의 사각지대는 극단적으로 냉혹하게 2세대분들의 가슴을 갈라 놓는다. 법이 어째 그리 촘촘하지 못하여 법 구실을 다 못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일본 정부나 러시아 정부와 얽힌 외교적, 법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면 좋겠지만, 그런 문제 해결의 전제없이도 우리 정부의 결단이면 어느 정도 가능한 일 아닐까 생각한다. 하물며 인구도 수십년 간 하염없이 감소하고 있어 국가 소멸의 길로 가는 절체절명의 시기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가 묻고 싶다. 나는 2세분들의 사무치고 뼈저린 한마디 한마디를 기억한다. "왜 한국은 그렇게 발전했으면서 우리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죠? 옛날엔 가난했다, 전쟁으로 힘들었다, 다 이해해요. 그런데 지금은요?" "부모들은 우리에게 한국어와 한자를 가르쳤어요. 조국에 돌아갈 때까지 잊으면 안된다고. 저 산 넘어가면, 바다 건너가면 조국 조선땅이 있다고 했어요. 고향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소련 시절에, 영주귀국 전에, 병으로, 이중징용으로 다 돌아 가셔서 우리들은 갈 기회가 없어졌어요. 우린 뭐에요?" "부모가 끝내 돌아가지 못한 고향에, 왜 사할린에서 태어난 2세들은 못 살아 보는 거죠? 한국말도 말하고 생활방식도 한국식으로 잊지 않고 지켜왔는데?" 한국 교육부에서 파견 나온 교육공무원은 이에 대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다만 ‘제가 그런 것을 결정하거나 영향을 미칠 만한 능력이 없어서 죄송해요.’ 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의 애환을 담은 가사에 노래를 불렀고, 교실과 공원에서 한국의 인기 가요를 불렀으며 탈춤을 소개하고 민속춤을 같이 추었으며 한국문화 수업을 했다. 그리고 ‘한국어말하기대회’에서 발표하실 내용을 컴퓨터로 옮겨 드리고 약간 교정하는 역할만을 했다. 나는 한국에 복귀 이후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의 행사에는 가능한 참여하고 있다. 지난 3월 23일 파주사할린동포회 영주귀국 15주년 행사에서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님을 비롯한 사할린동포들과 함께 사할린아리랑이 대합창으로 불려졌다. 사할린이라는 말만 나와도 눈믈을 흘리신다. 우리는 그분들이 흘리신 디아스포라의 눈물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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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귀국동포회, '동포 소식 전달' 김경희 KBS PD에 감사장"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이주를 당한 사할린 동포들의 존재는 잊혀진 우리 한민족 역사입니다. 8년째 프로그램을 만들며 사할린 한인사를 더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의미 있는 기획을 하려고 고민해요." 2017년부터 KBS라디오 한민족방송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를 이끄는 김경희(59) KBS PD는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회장 권경석)에서 감사장을 받은 소감을 밝혔다. 국내로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 단체인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는 지난 23일 사할린 동포들의 경기 파주 정착 15주년을 기념해 파주평생학습관에서 열린 '파주 아리랑 콘서트'에서 김 PD에게 감사장을 전달했다. 당시 권경석 회장은 "사할린 동포들의 이산(離散)과 '이산의 이산'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며 "이 프로그램을 통해 사할린 동포들이 잃어버린 가족을 찾았고,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는 사할린 동포, 고려인, 중국 동포 등 북방 지역 동포들과 국내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 한민족의 문화와 생활정보를 제공해 민족공동체 의식과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한민족방송 대표 프로그램이다. 사할린 동포들이 고국의 가족을 찾고 싶다는 요청에 따라 1972년 4월 '사할린 동포에게'라는 제목으로 처음 방송을 시작했고, 1988년 프로그램 제목을 현재와 같이 변경했다. 2022년에 개설 50주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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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동포연합, KBS한민족방송 김경희 PD 감사장 수여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는 KBS한민족방송 김경희 PD에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지난 23일 경기도 파주시에 정주하고 있는 파주사할린동포연합회(회장:이화일)는 영주귀국15년을 기념하는 파주아리랑콘서트를 개최했다. 이 식전 행사에서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는 KBS한민족방송 김경희 피디에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사할린동포들과 KBS방송국은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1970년대에에는 사할린에 있는 동포들이 KBS방송국으로 편지를 보내면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찾아줬는데, 이 방송을 듣고 통해 수많은 사할린동포들이 가족을 찾았다. 또한 한국에 영주귀국한 후에도 가끔씩 공개방송을 통해 위문잔치를 해주기도 했다. 특히 2022년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주년 공개방송에 사할린동포들이 초대되어 특별코너 무대에서 사할린 한인의 역사에 대해 진술하기도 했다.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에서 사할린 동포에 대한 관심을 많이 기울여줬다. 영주귀국한 사할린동포들의 사연을 편지로 보내서 사연이 방송되기도 했고, 'KBS 한민족 체험수기'에 사할린동포들의 이산과 고난이 담긴 살아온 이야기를 내놓은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우수상, 대상 등을 받기도 했다."며 "방송국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고 사할린동포의 강제징용, 이산의 이산, 이중징용에 대한 역사적 진실에 귀를 기울여줘 큰 힘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또한 체험공모전을 통해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방송을 제작한 김경희 피디에게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감사장을 전달했다"고 전했다. 한편 KBS 한민족방송의 간판프로그램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는 사할린 동포들이 고국의 가족을 찾고 싶다는 요청에 의해 1972년 4월 3일 시작된 ‘사할린 동포에게’ 방송으로 출발했다. 특히 2000년부터 사할린동포들의 이산과 '이산의 이산'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가족을 찾는 사연이나 편지를 소개했고, 사할린 동포들이 잃어버린 수많은 가족을 찾아줬고, 또 책과 달력을 보내기도 했으며 노래자랑과 위문공연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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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자녀 함께 영주귀국 가능해진 사할린동포특별법 개정안 공포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등으로 러시아 사할린에 이주한 사할린동포가 자녀 모두와 함께 고국에 영주 귀국할 길이 열렸다. 재외동포청(청장 이기철)은 사할린동포의 영주귀국 대상이 '직계비속 1명'에서 '자녀'로 확대된다는 내용 등의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하 사할린동포법) 일부개정법률안이 16일 공포됐다고 밝혔다. 개정법률안은 공포일로부터 6개월이 지난 오는 7월 17일부터 발효된다. 재외동포청은 사할린동포법 시행령 등 하위법령 개정 등 준비 작업을 마친 후 2025년부터 자녀 전체로 동반가족의 범위를 확대하여 사할린동포 영주귀국 및 정착 지원 사업을 추진한다. 올해 영주귀국 사업은 개정법률안 발효 전인 6월 30일까지 현행 시행령에 따라 지원자를 신청받는다. 사할린동포법은 사할린에 이주한 사할린동포에 대해 관련 국가와의 외교적 노력으로 그 피해를 구제하고, 사할린동포와 그 동반가족의 영주귀국과 정착을 지원하기 위하여 2020년 5월 제정됐다. 이 법에 따라 영주귀국 및 정착 지원 대상자로 선정된 사할린동포와 그 동반가족은 우리 정부로부터 ▲귀국에 필요한 운임 및 초기 정착비 ▲거주 및 생활 시설에 대한 운영비 ▲임대주택 등의 지원 등을 통해 정착해 왔다. 그러나 사할린동포와 함께 영주귀국을 할 수 있는 동반가족은 '배우자와 직계비속 1명 및 그 배우자'로 한정됐었다. 이에 따라 자녀가 여러 명인 동포는 러시아에 나머지 자녀를 두고 영주 귀국하는 등 또 다른 이산의 아픔을 가져야만 했다. 개정법률안의 시행으로 사할린동포 1세 부모·자녀와 사할린동포 2세 형제·자매가 떨어져 살지 않고 귀국하여 한국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개정법률안은 이 밖에도 ▲영주귀국 동포 및 동반가족의 실태조사 의무화 ▲지방자치단체의 사할린동포 지원 근거 마련을 위한 조항도 신설해 보다 실효성 있는 지원을 뒷받침하게 했다. 재외동포청 아주러시아동포과 정선호 과장은 "사할린동포 사회의 숙원이었던 사할린동포법이 공포된 만큼, 재외동포청은 앞으로도 국가가 재외동포들의 곁에 있음을 체감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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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위원장, "실제적 아리랑고개는 문경새재"인류무형문화유산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 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이만유)에서는 문경시의 지원을 받아 '아리랑도시 문경'의 정체성과 위상 확립 및 '문경새재아리랑'의 저변 확대와 대중화에 기여하기 위해 '2021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지난 코로나 기간에서는 방역상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방역지침을 지키며 문경을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문경새재아리랑 알리기와 아직 문경새재아리랑을 제대로 알고 부르지 못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시행해 오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이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는 사실과 아리랑사에서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전승, 보급하지 못하였고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에 비교해 전 국민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인지도가 낮은 상황이다. 특히 지난 2020년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만들어(작사, 작곡) 발표한 ‘코로나아리랑’을 함께 교육하고 불러온 아리랑으로써 코로나19의 방역을 계도하고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게 노력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Q: 지난 해를 회고하신다면? A: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2017년 창립된 이후 꾸준히 참여하고 추진해 온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위 ‘문경새재' 등 유명 관광지에서 개최하여 총 5회에 걸쳐 921명이 함께 전통 춤사위와 함께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참석자들은 단순 관광객을 넘어 ‘문경새재아리랑’을 전파 확산하는 전도사이면서 아리랑홍보대사로서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특히 지난해 세 번째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을 사할린동포와 함께 한 것입니다. 사할린 귀국 동포 100여 명이 새 둥지를 틀어 살고 계시는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을 찾아가 디아스포라(이산)의 아픔을 아리랑으로 풀어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연말에 (주)국악신문이 주관하여 추진한 ‘사할린 동포 청소년 장학금 지원사업’에 우리가 작지만 100만 원을 후원하여 아도위 42명 모두 뜨거운 동포애를 나눈 기억입니다.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중 68 퍼센트가 경상도 사람이라는 것을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펐습니다. 처음 만나서 손잡고 아리랑을 부르면서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아리랑으로 70년 동안 겪으신 이산의 아픔이 치유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날 함께한 행사가 사할린 새고려신문에 기사가 2번이나 나간 것을 받아 보고 진정한 동포애를 느꼈습니다. Q: 시민위원회의 활동 목표는? A: 궁극적인 목적은 같지만. 기존하는 각 지역의 ‘아리랑보존회’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닌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아리랑의 주인이며, 아리랑을 향유하는 주체(민초, 백성, 국민)인 순수 민간인들로 구성된 국내 유일 자발적 전승단체입니다. ‘문경새재아리랑’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고, 많은 아리랑에 영향을 주고 여러 아리랑을 파생시켰으면서도 정선, 진도, 밀양 등 유명 아리랑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2012. 12. 05.),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 지정(2015. 09. 22.),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문경, 세상의 모든 아리랑을 품다”라는 주제로 ‘아리랑 도시 문경’을 선포함(2015. 12. 13.)에 이르러게 됨에 이에 호응하여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2017. 06. 29)를 창립하여 아리랑에 대한 조사, 연구, 발굴, 보존, 전승, 보급에 역점을 두고 교육과 공연, 아리랑 관련 콘텐츠 개발, 학술발표회 등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시민위원회의 활동 목표는 모든 아리랑을 품으면서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문경새재아리랑’을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 모두 알고 즐겨 부를 수 있도록 하며, 아리랑고개가 우리 민족의 심성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경새재’가 ‘아리랑고개’임을 인식하게 하여 ‘아리랑의 성지, 문경새재’가 될 때까지 진력할 것이며 그 상징으로 꺼지지 않는 ‘아리랑의 불꽃’이 영원히 타오르도록 할 것입니다. Q: 문경시 보호문화유산 문경새재아리랑 제정 이후의 변화와 기대는? A: 2022년 ‘문경새재아리랑(송옥자)’이 ‘문경시보호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아리랑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고 환영합니다. 아직은 보호문화유산 지정 이전이나 이후의 변화는 희박합니다. 한가지 바램은 전수자, 이수자 등은 문경지역에 뿌리를 둔 문경지역 정서를 지닌 사람이 선정되어 토속민요의 전통성을 이어갔으면 합니다. Q: 문경새재아리랑축제의 2년 연속 휴면 상태에 대해? 타개책은 무엇인가요? A: 우선 선결과제로 ‘대동, 상생, 저항’이라는 아리랑 3대정신을 망각하고 아리랑이란 이름 앞에 아리랑을 욕되게 하고 아리랑 관련인들의 상호 화합을 저해하고 분쟁과 편 가르기를 일삼는 사람이 아리랑을 주무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또 내외부 인사들이 그런 류의 사람과 뇌동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지역 내 아리랑 관련인 모두 하나 되길 기원해 봅니다. 문경시는 2015년 ‘아리랑도시 문경’을 선포하는 등 적극적인 사업을 추진하여 다소 성과를 내었지만, 아직도 관에서는 제한적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아도위는 문경시 일원 중 유명 관광지, 휴식처 등 시민,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서 문경새새아리랑 이론 교육과 노래 교습, 다듬이 체험 등으로 누구나 직접 참여하고 부를 수 있는 마당을 펼쳐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하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축제’가 2년 연속 개최되지 못함의 원인과 대책은 이렇습니다. 첫째, 내분, 편 가르기, 내 아니면 안 된다는 잘못된 우월 의식, 분쟁 조성자의 망동입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아리랑 관련인들의‘대동, 상생, 저항’이란 아리랑 정신의 회복과 의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둘째, 관련 기관과 리더가 아리랑에 대한 가치와 인식의 부족함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또 문화예술 분야의 장르 편향이 아주 심합니다. 예를 들면 축제의 공간에서 트롯트에 치중하고 아리랑은 소홀히 하는 것이지요. 이제 아리랑의 가치 회복과 리더와 관련자들이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예산의 편중 지양과 아리랑축제의 쥐꼬리 예산을 해소해야 합니다. 셋째, 아리랑축제 주관 단체를 한 곳에 고정하여 안일, 나태로 변화를 추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정체성과 전통을 지키면서 시대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이 미흡한 것도 문제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축제 주관단체를 공모제로 전환하고 예산하마인 셀럽형 축제를 지양하고, 주민이 주체가 되는 축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내 공연 위주의 축제에서 야외 공연(실제적 아리랑고개=문경새재)으로 전환해야 하고, 지역 내 모든 아리랑 단체 및 전문가가 모인 ‘아리랑축제추진위원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Q: 귀 단체의 새해 역점 사업은? A: 변화를 추구하면서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지속해서 추진할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찾아가서 ‘독도는 한국 땅’이다. ‘근대 아리랑 시원'은 문경새재아리랑이다.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란 깃발 아래 '제3회 문경새재아리랑 공연과 문경아리랑 알리기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독도를 가는 여정에서 거리에서 '문경새재아리랑 버스킹'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전국 지역 아리랑답사, 전국아리랑경창대회 참가, 제4회사할린아리랑축제 참가는 계속 이어지는 아도위의 여정입니다. 아도위 자체 사업의 일환으로 문경새재아리랑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리기 위해 ‘관광객과 함께하는 '아리랑 버스킹' 공연을 관광 시즌에 문경새재에서 열 계획입니다.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통해 회원들의 친목 도모와 역량 강화를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Q: 기타 하시고 싶은 말씀은? A: 우리 아도위는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라는 역사적 사실과 명실공히 ‘아리랑 도시 문경’이란 이름이 빛나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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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청, 2024년에도 ‘재외동포 보듬기 사업’재외동포청(청장 이기철)이 2024년에도 ‘재외동포 보듬기’ 사업을 이어간다. 올해는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지 160주년이 되는 해다. 재외동포청은 근대 역사에서 최초로 해외에 이주한 고려인 이주사를 재조명하고, 러시아·독립국가연합(CIS) 지역 고려인과 모국과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다양한 행사를 열 계획이다. 올해부터는 사할린동포들의 모국 영주귀국 범위가 확대된다. 지난해 12월 20일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이에 따라 영주귀국 대상이 ‘직계비속 1명’에서 ‘자녀’로 확대된다. 사할린동포법 개정안은 공포일로부터 6개월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된다. 재외동포청은 올해 준비 기간을 갖고, 2025년부터 동반 가족의 범위를 확대해 사할린동포 영주귀국과 정착 지원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재외동포청은 또한 난치성 혈액 종양으로 고통받는 재외동포들과 해외에서 일어난 위급하고 곤란한 상황에서 피해를 입은 동포들을 지원하는 사업도 벌인다. 이를 위해 지난해 12월 한국조혈모세포은행협회와 그리고 지난해 7월 대한적십자와 업무협약을 맺었다. 재외동포청은 또한 올해 5월 세계한인입양동포대회를 열어, 해외 입양동포들과 유대를 강화할 계획이다. '재외동포 보듬기 사업'은 지난해 6월 5일 출범한 재외동포청의 제1호 사업으로, 재외동포청은 사할린동포, 원폭 피해 동포, 파독 근로자, 고려인 동포들과 같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거나 소외된 동포들의 어려움을 보듬고 위로하는 사업을 추진한다.소외된 재외동포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이 행사에 초청된 권경석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장, 인무학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부회장,주훈춘 안산 고향마을 사할린영주귀국자노인회장과 안산사할린귀국동포회 주민 100여 명이 참석했다. 권경석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장은 "새로 개정된 사할린동포 지원 특별법에 의하면 영주귀국 대상이 ‘직계비속 1명’에서 ‘자녀’로 확대된다. 사할린 한인 이산의 아픔을 극복하는데 큰 위안이 된다. 국가에 감사드린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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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이산가족의 날 기념전서울시는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5일부터 내년 1월21일까지 ''이산가족의 날 국가기념일 지정 기념, 다시 만날 그날까지' 무료 전시를 연다고 4일 밝혔다. 전시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문제 해결을 위해 걸어온 발자취를 되짚어 보는 사진과 유물로 구성됐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발자취를 되짚어 보는 사진과 유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이산가족의 날' 국가기념일 지정 취지에 맞춰 이산가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마련됐다. 관람 시간은 평일과 주말 오전 9시∼오후 6시다. 공휴일을 제외한 월요일과 1월1일은 휴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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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2편)가라후토에 맺은 의형제 박득수는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화태에 들어가셔서 산중에 사는 누나 집에서 거의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 힘든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기로 결심한다. 누님이 그저 밥은 먹여 주지만 옷도 안 사주고 돈도 안 주고 하니까 더욱 눌러 앉을 수가 없게 된다. 박득수는 누님 집에서 3년 있다가 돌린스크 시내로 내려 왔다. 일본사람의 꼬임에 모집으로 들어온 조선사람들을 만나 같이 잡일을 하게 된다. 어른들과 같이 살면서 숙소도 함께 하면서, 모두 정이 들어서 형님 아우로 의형제를 맺으면서 지내게 되는데 박득수는 가장 막내였다. 5년후 가장 나이 어린 박득수는 글도 아는 정직한 청년이어서 형님들에게 많은 사랑과 희망을 받게 된다. 장가를 갈 나이가 들자 가장 맏형 고 오지상이 당장 장가를 가야한다고 한다. ”수!, 너 여기 있지 말고 한국에 나가 가주고 장개 들라. 여기서는 여자들이 없다 보니께 일본 여자한테 장개 가지 말고 한국 가서 장개 들어 가지고 오라! 우리는 조선에 처도 있고 자슥도 두고 와서 이렇지만은, 너, 다까하라, 너는 이렇게 해서 나이 어린게 안된다. 고향에 가서 장가를 들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어라" 그는 진심 어린 걱정을 해주었다. 그래서 조선사람들과 누이 내외가 조선행 배삯을 거둬주어서 박근수는 24살에 고향에 나가게 됐다. 8년 만에 나간 조선에서 집안 어른 중신으로 아내(강순예)와 결혼하게 됐다. 가라후토 강제모집과 이산 박득수는 결혼 후 조선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소박한 희망은 허사가 되어 버렸다. 안성면 사무소에서 모집 영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1936년, 1937년에 흉년이 들었지. 2년 동안에 흉년이 들어서 농민들은 먹고 살기가 매우 바빴어. 마침 그럴 때 일본이 지나사변으로 중국과 싸우다가 젊은이들이 군대에 동원돼 노무자가 부족했어. 흉년이 든 상황에서 일본은 모집을 시작했단다. 어느 탄산이 모집한다는 광고가 여기저기 붙었었지. 그러니까 조선에서는 생활이 바쁘고 먹고 살기가 바쁜데 모집을 한다니께, "아! 일할 데 있으면 어디든지 가야지!” 라고 하니 일본 놈들이 그저 막 강제오 데려 간거야. 1938년에 네 둘째 박기남 삼춘이 일본 구주(九州, 규슈)로 모집가서 탄산에서 사고를 당하고 불귀가 됐어." 아버지가 나에게 그 당시 상황을 상세히 밝혔다. 처음에는 모집 광고로 해서 많은 조선인들을 데려갔는데 점점 모집을 광고 없이 하고 다음 지원자가 나오지 않자 강제연행으로 바꿨다. 일본회사가 모집을 하면 조선총독부를 통했는데, 총독부에서 어느 면에서 몇 명을 보내야 한다면 조선 앞잡이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영장을 전달했다. 박득수는 이미 가라후토에서 살다 왔으니까 모집영장이 잘못 나왔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토리우치보(헌팅캡)를 쓰고 당꼬바지를 착용한 형사가 새살림을 시작한 신접 살림집으로 들이닥쳤다. ”너, 다까하라, 이리 오라! 너 영장 받았니? 왜 면사무소에 안 왔니?" "나는 벌써 화태에 갔다 왔습니다. 그래서 영장을 내게 잘못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빠가야로! 너는 무조건 가야해! 빨리 준비해서 나와" 이렇게 새신랑 박득수는 강제모집으로 결혼 일년반 만에 가라후토로 끌려가게 됐다. 면사무소에 갔을 때, 거기에는 이미 백 여명의 모집을 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에 니무라와 마쪼까 두 친구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로는 동네 경찰서에서 일본 사람과 조선사람 앞잡이들이 와서 "우리는 내선일체다 천황의 명령이다”라고 하면서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지나 전쟁이 막바지에 다달았다. 이제 결승전이다 보니까 1년간 가라후토로 가서 일해라”고 윽박지르고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르면서 노예 취급을 했다. 25살 새 삶을 시작해야 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운명과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우리가 나가면 집에 일할 사람이 없고 어머니는 굶어 죽는다”고 애원을 하니까 앞잡이들은 ”집에 여자들이 있으니 1년간 살 수 있을거”라고 설득하고 달랬다가 발로 차고 때렸다. 앞잡이는 총독부 명령에 따라서 국민들은 꼭 가야만 한다고 했다. 아니면 니네 가족은 배급을 못 탄다. 아니면 아직 어린 여동생이나 딸을 위안부(정신대)로 내놓으라고 칼을 휘두르며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무주군 안성면에서는 가라후토에서 온 일본인 사무소장과 김수문이라는 함바(飯場, 현장 근처 노동자 숙박소)사장을 맞이했다. 가라후토에 가면 얼마의 돈을 번다든가 어떻게 산다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도 없이 그냥 가라는 것이었다. 그 때 안성면에서 모인 사람들이 열둘인가? 열넷인가? 그 정도 모였다. 함바 사장인 김수문은 다른 지역으로 사람을 모우러 나가고, 일본인 사무장은 남아서 징용을 가는 조선인들을 감시했다. 그날 밤은 여관에서 자고 아침 일찍 기차 타고 부산으로 떠났다. 일본인들은 그 당시 공습 때문에 무서우니 밤에 다녔다. 부산에 도착하니까 소독소로 보내서 모든 일행을 소독하고 목욕도 시켰다. 밤 아홉시 쯤 되어서 부두에서 연락선 공고마루에 승선했다. 한밤중에 배를 타고 부산항에서 출발하여 일본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으로 갔다. 아침 해 뜰 무렵에 도착했다. 그때 만난 사람들과 합쳐져서 열여섯 명이 한 그룹이 되어 함께 다다미(たたみ,타타미)를 배 가장 밑바닥에 있는 하등실 공간에서 모두 다 잠을 잤다. 그 때가 6월, 여름이니까 춥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하관에서 동경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 동경에서 또 하루 자고 기차를 갈아타고 아오모리까지 가서 다시 하루 자고 거기서 북해도 하코다테까지 배로 갔다. 북해도 북부에 위치한 와카나이에 가서 사할린 섬 오도마리항까지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부득이한 여행은 8일 이상 걸렸다. 박득수는 가라후토에서 오치아이(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다. 깊은 산 골짜기에서 아름드리 나무를 베는 일은 힘들었지만 할만했다. 6개월 후 조선에서 아내 강순예가 화태로 왔다. 박득수가 배치된 산판은 오치아이에서 한 630리가 되는데 이미 30명의 모집으로 온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어른들이 새집도 얻어 주고 살림살이도 장만해 주었다. 가족들도 한 여섯, 일곱집이 있어서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데 큰 고생은 안했다. "개인집에서 그 때는 한달에 2원씩 집세 받고 세 놓고 그랬어요. 방 두 칸짜리 이런데서. 그때는 주로 화롯불, 난롯불 놓고 거기서 밥 해 먹고 그렇게 살고 했어요.” 산판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부를 못한 분들이어서 강순예가 편지나 문서를 작성해주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인한테서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남편 박득수도 지식인으로서 브리가지르(бригадир,조장, 팀장)로 일했다. 벌목공들은 2년 동안의 계약을 맺고 왔는데. 기한이 지나도 일본 당국은 조국으로 돌려 보내지 않았다. 월급은 다 주지 않고 조금씩 내주었다. 나머지는 조선에 갈 때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끝까지 지켜지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산판에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박득수도 역시 시리도리(현 마카로프) 제지공장으로 일터를 옮겼다. 거기에서 일년 동안 일하고 조선사람들 한 30명을 모아서 니또이 산판에 가서 벌목일을 시작했다. 3년 후 1942년 조선에 살고 있는 친척들한테서 편지가 왔다. 조국에서는 너무나 살기 어려우니까 가라후토로 불러 달라고. 그래서 증명서를 보내 홀로 계신 어머니와 큰 형 식구 5명이 니또이 촌으로 오게 했다. 몇년 후 고모 가족도 우리가 사는 니또이에 이주하여 가까운 곳에서 함께 등 부비고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사람들은 기르던 앵무새와 개까지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조선인들은 영영 귀환하지 못했다. 남의 나라 전쟁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강제동원 되어 잠시 있다가 돌아가는 줄만 알았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4만3천 여명의 이산가족이 해방된 사할린에 나타난 것이다. 언제가 조국과의 상봉을 꿈꾸며 이국 만리에서 낯선 민족들과 뒤섞여 살아야만 했다. 러시아 180여개 민족 중 식민국민이라는 낙인이 찍힌채.......소련은 일본이 버리고 간 탄광과 산판. 펄프공장에 투입할 노동력이 필요했고, 불안정한 조국은 우리를 데려가지 못했다. 남화태에 남겨진 30여 지역 탄광에서 돌아가는 기계는 일본어를 아는 조선인이 작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양인의 몸 사이즈에 맞춘 탄광 지하 갱도는 서양인의 체구에 전혀 맞지 않았다. 남겨진 조선인을 관리하기 위해서 소련 정부는 큰땅(대륙)에 사는 고려인 지식인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완장을 채우고 우리를 감시하고 체계적 시스템을 조직하여 노동력을 착취해 나갔다. 배급을 받아야 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해져 가고 일본말과 조선말을 못 쓰게 하고 소련 정부에 적응하는 동화정책을 실시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조선말과 조선 이름 대신 러시아 이름으로 바꾸어야 불이익을 안 받게 된다. 사할린 한인 국적도 조선, 일본, 소련, 북한, 러시아 등으로 5번 변경되면서 국적에 따라서 이름도 바뀌게 된다. 그래서 2세부터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젖줄같은 고향땅 논밭전지와 집문서를 맡겨놓고 온 사람, 홀로 남은 늙은 어머니를 친척집에 맡겨놓은 사람, 어여쁜 아내와 자식들이 기다리는 사람 등등 사연도 많고 많다. 조선인들은 코르샤코프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미쳐서 죽고 얼어죽어 나갔다. 장가도 못간 청년들은 남편 잃고 여러 명의 아이가 딸린 여자와 살아야 하고, 두고 온 가족을 그리다가 평생 재혼도 하지 않고 홀아비로 살다간 사람, 산판과 탄부에서 죽도록 일하다가 지병을 얻어 일찍 죽거나 나이를 먹어서 죽은 사람들은 결국 고향으로 못가고 가라후토에 뼈를 묻어야만 했다. 특히 정신대로 끌려와서 버려진 어린 여성들을 평생 껴안고 남편으로 아들 딸로 살아야만 했다. 아버지의 노래 고향을 그리던 박득수는 1977년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억울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제1 공동묘지에 영원히 안치했다. 매년 8월 15일 추석날 우리 가족은 모두 아버지의 묘옆에 묵묵히 서 있다. 3명의 아들과 2명의 며느리. 손자들을 데리고 그리운 아버지를 소환해 본다. 오늘은 아버지를 위한 시를 준비했다. 세월을 잘못 만나서 낯선 땅에서 억울하게 살다가신 아버지의 이산과 억류, 미귀환에 대한 아픔을 시로 지어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두 손으로 바쳤다. 나는 천천히 낭송을 해 드렸다. <아버지의 노래>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 여년에 청춘만 늙고 추석밤 청명한 보름달 바라보며 철새따라 가고팠던 아버지의 노래! 일제에 억울하게 땅을 빼앗기고 할아버지 아버지 형님을 여의고 열여섯 젊은 시절 가장이 되어 일제시대 엄동설한 화태로 들어가서 산판에서 만고풍상 겪으셨고 스물다섯살 고향가서 아내를 얻었지만 꿈같은 신행도 얼마 못가고 강제모집 가라후토로 끌려갔네 산판에서 위험한 벌목장에 목숨을 바치시고 소련시대 위태로운 강에서 유송하시고 토끼같은 사남사녀 팔남매 밝게 키우시고 조선민족 풍습과 예의범절을 가르치시네 육년동안 험한 중풍에 시달리셨으나 자식 앞에서 흉한 모습 보이지 않으시네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그리운 고향주소 소리없이 불러보시네 매년 팔월십오일 아버지 묘비명에 서있네 살아생전 아버지의 소원을 못 들어드려서 손자손녀들 사할린에 뿌리를 내리지만 밀양박씨 대대손손 영원하리라 아버지가 불렀던 노래 한 구절은 평생 그리워하던 고향집 주소였던 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12번지”는 아버지의 노래이고 영혼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잊지 않으려고 늘 우리들에게 되새겨 주셨던 것이다. 너라도 반드시 찾아가서 밀양박씨 집안 어른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갈 수 있었다. 나는 11년전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아내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땅을 찾았지만 우리 집안을 알던 이웃 어른들은 모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빚이 되었는데. 2019년 어느 봄날 다시 무주땅을 찾아가서 안성면 이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와 같이 총 14명이 강제징용으로 차출되었는데, 돌아 온 사람은 단 1명만 부상을 당해서 장애자가 되어 돌아왔는데 후에 그 자식들은 이민을 갔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아버지의 이름이 박힌 호적등본 사본을 안성면사무소에서 신청해서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 석자 박득수와 주소가 찍힌 호적등본과 아버지가 살던 집터의 흙을 고이 담아서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왔다.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를 뵐 낯이 있게 되어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2달후 7월이 되어 사할린에 들어갔다. 사할린 땅에 묻히신 아버지와 어머니. 고모의 묘지를 찾았다. 아버지 혼령 앞에 호적등본을 보여 드리고 고향집 주소를 큰소리로 읽어 드렸다. 이어서 고향집 흙을 뿌려 드리면서 술 한잔을 올리자 나는 아버지가 읊으시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아들에게 손자에게 일러줄 것이다. 아버지의 고향집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12번지” 아버지! 이제나마 편안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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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1편)2023년 제25회 한민족 체험수기에서 사할린 동포 3분이 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어 오는 2일 시상식이 예정되어 있다. 공동 우수상을 받은 수기는 박승의 씨의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 러시아 사할린 코르사코프시 발레리 오(오석만) 씨의 '사할린 한인 2세, 오래된 희망',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인무학 씨의 '내가 아는 고려극장 맹동욱'이다. 이 수상 소식을 듣고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이 우리 사할린에 살고 있는 동포들도 다 읽어볼 수 있게 국악신문에 개재를 요청하게 되어서, 3분의 수상작을 5부로 나누어서 게재를 한다. 다음은 박승의 씨의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는 전라도 무주에 살던 가족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토지 수탈 정책으로 소작인과 농민들이 하루 아침에 생명줄을 이어주던 땅을 뺏기자, 살기 위해 한반도를 떠나게 된다. 평화로운 한 가정이 일제의 강제모집에 속아서 사할린에 끌려가면서 이산과 고난이 시작된다. 3대에 걸친 사할린 가족사이다.(편집자 주) 이 글은 사할인 한인 1세 아버지(박득수, 1915년생)와 어머니(1922년생), 할머니(1883년)에게 전해 들은 밀양박씨 집안과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누이가 끌려간 가라후토 전라도 무주에서 살던 나의 아버지 박득수는 16살 어린 나이에 누님 박봉순이 살고 있는 가라후토로 가기로 결심한다.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대대로 부치던 땅을 빼앗기자 아버지는 화병을 얻어 졸지에 아버지를 잃게 되고. 형님마저 큰집으로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피폐해진 조선의 농촌은 먹고 살길이 막연하였다. 박득수는 강제모집에 속아 가라후토에 끌려간 누나가 있는 곳에 가면 무언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생길 것만 같았다. 박득수는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한 방책으로 일본 교장집에 가사도우미로 맡겨 놓고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라후토로 향했다. "어머이! 내 누님한테 갈래! 여기선 할일이 너무 없어서 못 견디겠어. 왜놈들 때문에 우리 조선사람들은 죽을 지경이야!" "니 아직 어린데 혼자 낯선 데서 어떻게 살라고?" "어머이! 가라후토에서 2년만 일하면 돈 많이 벌 수 있대. 또 거기 누님 있잖아. 어머이, 걱정마! 꼭 2년만 갔다 올께” 늦은 가을이었다.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덮었고 비가 올가 말가 했다. 마치 자연도 박득수의 기분에 동정하는듯 ... 검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기차는 전라북도 무주에서 출발하여 다음 날 새벽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부산 항구는 사늘했다. 때는 1931년 동짓달 그믐이었다. 먼 동해바다에서 불어오는 축축한 바람은 습기로 말미암아 눅눅해진 얇은 외투를 입은 부산항에 도착한 득수에게 뼈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부두에는 몇 백명의 젊은 남자들이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부산항을 출항할 때는 늦은 밤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박득수는 저 멀리에서 반짝이는 항구의 불빛을 바라봤다. 당시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시 한편에 실어본다. <고향> 잘 있거라 나의 조국! 귀여운 삼천리 금수강산! 출렁이는 바다 물결!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버리고 무얼 찾아 이국땅을 향하리까? 나의 어머니(강순예)는 당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 준다. "다음날 네 아버지는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동경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탔다. 동경서 친하게 지내던 양반이 있었대요. 그래 그 집에 가서 구경도 하고 하루 쉬어 가주고 자고 그래 인제 갔지요.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후에 급속도로 근대화를 달성한 도쿄의 모습, 즉 카페나 댄스홀, 영화관, 유곽 등 향락적인 거리의 모습은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일제강점기 빈곤에 시달리거나 일본사람에게 멸시당하는 조선사람들의 비애를 체험한 박득수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광경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 동경에서 어디, 그 오래 되어서 인제 잊어부려. 그 북해도 있지. 사할린 가는 배 타는 아오모리까정까지 가주고 거기서 또 인제 화태로 들어가는데. 그래갔고 언젠가 모르겠어…., 하여간 니 아부지가 동짓달 여기 오니께 눈이 막 오고, 배가 좀 출렁거렸대. 오도마리. 지금 콜사코프 (코르사코프)라 하지. 거 가서 내려갔어." 드디어 사할린 오도마리에 도착하니 매형이 보낸 일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라후토는 득수 총각을 땅위에 쌓인 눈과 추위로 맞이했다. 누님이 살고 있는 마누이라는 촌은 오찌아이(현 돌린스크시)에서 한 130리 떨어진 두메산골이었다. 말이 끄는 발구를 타고 5시간 이상을 매서운 바람이 부는 눈길을 헤치면서 나아갔다. 득수는 이렇게 많은 눈을 처음 봤다. 참 신기했다. 조선에서는 눈이 이렇게 많이 쌓이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발구(말이 끄는 눈썰매)에서 내려 눈길을 걷기도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나의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래 누님 집에 가니께 농사를 크게 짓고 그 외딴 집이 있대. 거기서 농사를 짓고 혼자 그렇게 있고 말 두 마린가 그렇게 메기고, 농사라야, 뭐랄까, 말 메기는 거 그런 농사지. 뭐 밀, 기밀 것은 농사 지어 갖고 그래 팔아 먹었데. 인제 일본 사람들 거기서, 산판에서, 이 말 메기는데서 사다가 멕여 (먹이려고 갖고) 가데. 그래 갔고 누님집은 괜찮게 살데. 돌린스크 오찌아이)서 한 130리 들어가는덴데 우리도 갔다 왔어. 아주 산중에 농촌인디 거기 한국에서 조선 사람들 모집해다가, 막 일본사람들이 모집해다가 벌목시켜. 나무 비는 거. 거기는 그 시누 있는데서도 많이 떨어졌어. 누님네 집은 가다 중간이고, 그니까 누님은 그 산판에서 가는 중간에 그 외딴집을 사가주고 남편하고 거기서 농사짓고 살고 있었지. 그래 농사를 지은 걸 저게 벌목하는 데 돌려보내서 이제 돈 벌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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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청년협의회 '사할린의 밤,동포애를 나누다대구청년협의회(회장 하태균)이 주관하는 '제8회사할린의 밤' 행사를 지난 10일과 11일 이틀간 대구광역시 그랜드호텔에서 개최하였다. 1996년 사할린 첫 방문을 계기로 대구시와 민족통일 대구청년협의회는 2008년에서 2019년까지는 사할린에서 '대구의 밤'을 2016년부터는 대구에서 '사할린의 밤'을 매년 개최하고 있다. 사할린 어른신들을 위한 대구청년들의 실천운동은 16년째 진행되고 있다. 하태균 회장은 "사할린의 밤 행사에서 흥에 겨워 혼자 춤사위를 펼치셨던 어르신과 "이런 흥겨운 음악과 기쁜 자리에서 어찌 어깨춤이 나오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던 말씀처럼 그 여덟 번째 기쁜 날을 기념하며 사할린을 오고가며 뜨거운 동포애를 나누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10일 전국사할린영주귀국동포연합회 전국 지역 회장단15명과 안산, 인천 논현동 5단지, 부산에 정주하는 사할린 동포들 120명 등 모두 약 140명이 참가했다. 환영 오찬 후 가진 본 행사에서는 개회 선언을 시작으로 표창장 수여 및 감사장 전달, 전국사할린영주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 각 회장단 인사말과 하태균 회장의 환영사를 비롯 사진촬영을 마치고 2부 축하공연을 선사했다. 전국사할린영주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81세) 회장은 "태평양전쟁이 끝났지만 1945년부터 사할린에 억류되어 가슴 아픈 이산과 함께한 우리 사할린 영주귀국 동포를 변함없이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대구 청년들에게 감사한다. 사할린 동포 중 68퍼센트가 경상도 출신이다. 이런 인연으로 매년 우리를 맞이해 주는 대구의 큰 마음에 따뜻하고 행복하다"며 대구 청년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대구광역시장 홍준표 시장은 "대구에서는 여덟 번째 만남이 되는‘사할린의 밤’행사가 고향의 향수를 달래고 모국 정착 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여기에 머무르시는 동안 대구의 아름다움과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축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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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타고난 안무가 전황의 춤인생과 예술세계국악계로 지평 넓힌 정통파 무용가 이매방(1927-2015.8.7, 국가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 27호 승무보유자), 강선영(1925-2016.1.21., 국가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보유자), 김덕명(1924-2015.10.24, 경남무형문화제 제3호 한량무보유자) 전황(1927-2015,5,16,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국립창극단장)등 원로무용가들과 중견무용가 정재만(1948~2014), 임이조(1950~2013), 지희영(1949~2015) 등의 작고는 격동기 근대무용사의 산증인들이자 역사적인 인물들, 과거사를 증언해주고 알려줄 대영박물관과 같은 역사자료가 소실된 것 같은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다. 전황선생님은 80대에도 청년같은 외모와 건강한 모습으로 공연현장에서 유일한 원로관객으로 뵙던 분으로 가장 장수하실 것 같았는데 지난해 갑작스런 비보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간 전황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말쑥한 양복차림, 반듯한 자세로 빼어나게 멋진 노신사의 모습에 부러움과 존경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과 불가사이한 점도 많은 분이라는 데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80대 고령임에도 청년같이 건강하고 멋지고 미남인 신사로 사셨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세계적인 근대무용가 최승희의 정통파 제자이면서 몇 안 되는 남성 한국무용가인데 어찌하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악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는가? 타고난 공연예술의 스타집안과 성장배경 전황(全璜, 본명 전두황)은 1927년 3월8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에서 전영술과 신명이의 5남3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부친 전영술은 함흥시 재판소 앞에서 사법서사를 하며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부친은 해방 직후에 작고하였고, 모친은 6·25전쟁 직전에 작고하여 어려움도 겪었지만 형제자매들이 대중스타로 우뚝 솟아 있었기에 전황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맏형 전두옥은 역시 함흥출신 무용가 조택원과 고향친구였고,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와 절친으로 영화배우 겸 권투선수였으며, 중국에서 배운 18기 무예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고, 승용차를 팔로 끄는 차력도 자랑했다. 누나 전옥(全玉, 배우, 본명 전덕례, 1911~1968)은 ‘눈물의 여왕’으로 무대와 스크린의 톱스타인 그녀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셋째형 전두철은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사촌형 전운봉은 남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였고 북쪽에서도 인민배우로 대접을 받았다. 누나 전옥과 매형 강홍식(姜弘植, 1902~1971, 이시이 바꾸의 제자, 해방공간 당시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소장, ‘봄타령’을 처음 부르고 유성기음반 취입한 가수)의 딸 강효실(姜孝實, 1932~1992)도 다 아는 영화배우이며, 강효실의 아들 최민수도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어 전황의 가계가 한국 근현대공연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황의 딸 전미례는 본래 한국무용을 전공하였지만 아버지처럼 분야를 바꾸어 ‘재즈계 여왕’이라 불리는 재즈무용가로 활약하고 있다. 전황의 어린 시절 누나 전옥이 함흥 진사관에 공연하러 고향이 오면 집 앞에는 스타 전옥을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때 열서너 살 된 전황은 자랑스런 누나의 연극을 보기위해 친구들과 공짜손님으로 극장을 드나들곤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황은 1941년 함흥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함흥상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예인의 삶 속에 젖어들어 갔으며, 맏형 전두옥의 영향을 받아 1946년(19세)까지 권투선수생활을 하면서 강인한 체력과 민첩한 몸동작을 단련하였다. 이러한 가계내력과 성장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국가적인 스타가 될 만큼 수려한 외모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며, 형제들과 친척들이 예술가들이 많다 보니 전황도 자연스럽게 그런 무용, 국악 등 전통문화를 익힐 수 있는 가정환경이었다. 또 새로운 문물, 스포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문물과 예술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여 뛰어난 연기력, 체력의 유전적 DNA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황선생님의 인물치레가 범상치 않은 점은 이러한 천부적인 집안내력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유명 연기자들과 예술스타들이 타고난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과 노력이 가미될 때만이 보석의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말년까지 정정하고 강건한 자태와 인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맏형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권투선수의 기초훈련에서 익힌 날렵한 잽 동작과 발 스텝과 빠른 호흡과 민첩성 등으로 무용가로서의 유연성과 리듬감, 손놀림과 발놀림 등의 신체적 바탕을 갖추게 된 것임도 알 수 있다. 최승희 제자로의 입문배경과 공연활동 전황의 춤인생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 세계무대에도 잘 알려진 무용가 최승희와의 조우에서 비롯하였다. 1947년 3월 최승희가 전황의 고향 함경남도 함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침 남녀무용수 단원을 한명씩 뽑는다는 소식에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응시하였다. 전황은 젊은 혈기에 한번 도전해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하여 오디션을 받았는데 뜻밖에 최승희의 눈에 들어 많은 젊은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남자로는 유일하게 합격통지를 받고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으로 무용경력도 없었던 전황은 1등 합격으로 운명적인 춤인생이 시작되었다. 권투선수로 다져져 손발이 빨랐고 눈썰미가 좋아 최승희의 춤시범을 센스있고 날렵하게 잘 따라 추어 무용수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1946년 8월 개소) 3기 연구생으로 입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하고많은 거 놔두고, 남자 놈이 춤을 추냐’고 반대했었다. 전황은 집에 있는 공기총과 아코디언을 팔아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갈 여비를 만들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받는 국비 400원과 전옥누나에게 받은 용돈 50~100원, 어머니가 보내주는 100원으로 생활비를 삼아 알뜰하게 살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30여명의 연구생이 묵는 기숙사생 중에서 최승희의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배우는 수제자로 발탁됐으며 이로 인해 국비를 300원씩 더 받게 되었다. 당시 북측 정부에서 최승희에게 국비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최승희와 안막선생님께 면회를 요청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전하니 국비 중에서 추가로 200원씩 더 지급해 주었다. 이곳에서 전황이 신흥(新興)무용(지금의 현대무용), 조선춤, 남방춤, 러시아춤, 발레 등을 배울 때 바로 위 선배로 김백봉도 있었다. ‘딴 딴 따따딴, 딴 딴 딴딴딴’ 최승희선생이 북을 치면 그대로 발맞춰 따라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웠다. 반주악사가 없을 땐 리듬감각이 탁월하다며 북과 장구를 치게 했던 것이 국악을 섭렵하는 시초가 되었으며, 이렇게 국악에 눈떠 훗날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바탕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 후 전황은 국비 외에 800원의 월급도 받았는데, 그에겐 금전적인 수입보다 4년 동안 허실없이 배운 최승희 안무법과 음악선택법이 소중할 뿐이었다. 최승희 안무의 ‘초립동’은 안성희에게 배워 1947년(20세)에 추었다. "최승희 선생은 히스테리가 많았어요. 1948년 평양예술극장에서 제가 안성희·김백봉과 3인무 ‘옥중투사’를 추는데, 객석에 앉아 계신 어머님과 사람들이 ‘황아! 황아!’ 부르며 야단이셨죠. 그 소리에 저는 춤순서를 잊어버렸죠. 결국 최선생께 혼나고 긴 손톱으로 꼬집혀 살이 뭉개졌죠.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셨고, 기억력, 창작력,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셨구요” 전황은 1948년 고된 훈련 중에도 단원들 누구보다 동작과 자세, 그리고 순서익히기에서 남다른 끼와 천부적인 표현력을 인정받아 최승희무용단원으로 중국순회공연을 처음으로 다녀왔다. 중국순회공연을 하던 중 매란방의 〈손오공〉을 보게 되었는데 분장실의 매란방은 남성인데도 춤출 때는 여자같이 곱게 추었다고 하였다. 당시 최승희는 안무작업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매일 아침마다 두 달 동안 몰래 숨어 ‘노사공’ 안무를 보던 전황이 결국 최승희에 발각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스승은 ‘재주있는 놈’이라며 악사 옆에 앉아서 보라고 승낙하였다. 이렇게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4년 동안 최승희의 작업, 공연, 생활 등 모든 것을 전황과 김백봉만이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산증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7일에는 100명 규모의 방소예술단원으로 출국하여 9일 걸려 러시아 모스코바에 도착했었다. "하루 종일 달려야 역 하나가 나와요. 치타에 도착하니 거지 떼들이 몰려들어 돈 달라, 빵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우리도 기차 안에서 빵과 과자를 배급받아 먹었을 뿐인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당시 소련) 모스크바 공연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정숙 단장이 ‘조국전쟁이 일어났다. 남한이 쳐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방소예술단은 정치적 색채를 띤 단체였어요. 러시아 공연도 이미 약속된 공연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허정숙은 전쟁 중에도 예술단을 이끌고 공연을 감행하였지요. 러시아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공연장이었어요.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했는데, 무대에서 탱크가 돌고 10마리의 말이 거니는 규모였습니다.” 그 후로 예술단은 밤마다 이동해 귀국길에 올랐다. 평양으로 돌아온 후에 전황을 비롯하여 최승희무용단원들은 춤연습을 하다가도 폭격이 오면 최승희연구소의 지하실에 피하곤 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 구민관에서 ‘해방의 노래’를 공연했다. 어수선하고 자유롭게 나다니지도 못했는데 장추화, 송범 등이 구경을 왔었다. 전황은 군인으로 위장하고 동양극장에 출연하는 전옥의 충정로 집으로 갔는데, 누나는 없고 그 집은 민청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전황은 이산의 고통을 억누르며 ‘초립동’과 ‘목동과 처녀’를 추었다. 춤출 때는 이산의 고통을 잊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날 꿈만 꾸었다. 1950년 8월 예술단은 광주. 목포(여기서 이매방이 안성희와 전황의 춤을 봤다는 생전 증언을 들었다), 군산을 순회공연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길인 조치원에서 북한 군표와 남한 돈을 한 뭉치씩 받았다. 전황은 남한 순회공연을 하다 철수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되돌아가던 중 최승희의 딸 안성희 일행과 헤어졌다. 중도에 안성희는 인민군에 붙잡히지만 최승희의 딸이어서 평양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가을 전황은 최승희딸 안성희와 헤어져 빨치산 잔류들과 산을 타고 군화 소리 난무하는 평양에 겨우 도착하였다. "최승희 무용연구소로 가니 러시아에서 공연할 때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족은 없었다. 양복과 구두 등을 챙겨 스승 최승희가 있는 자강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전황의 운명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평안도 석암에서 과일을 사러 가다 예술단 악사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최승희도 여기 있다. 자강도로 가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누나가 있는 남한으로 가라”하였다. 그때 안성희와 김백봉도 만났다. 그리하여 전황은 석암의 악사네 집 지하에 숨어버렸다. 순수예술가로 살 길은 남한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는 산길에서 사흘을 굶고 허기져 살길이 막막해 허리띠를 나무에 걸었다. 목을 매 자살하려는 순간에 드라마같은 일이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연주자 최옥삼(가야금산조 명인, 최승희 반주자)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며 말렸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숨어 있다가 숨은 사람들 대표로 전황이 미국 제일기갑사단 대적선전대를 찾아가 "최승희 제자지만 전옥의 동생”이라 하여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1951년 1·4후퇴 때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그때 조카 강효실(당시 20세)은 작가 이서구(백조가극단 작품 집필)가 지프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충정로 누님댁에 가니 누님과 재혼한 매형 최일이 있더군요. 후에 누님댁은 트럭을 빌려 부산으로 피란가고 저는 국민제일 군위병으로 뽑혔으나 늑막염으로 군면제를 받고 뒤늦게 부산으로 갔죠.” 전옥은 백조가극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대스타인 김승호, 허장강, 배삼룡, 고복수, 황금심 등 백조가극단장 전옥의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작고 전에 현재 육군사관학교 뒤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배밭을 소유했는데 남편 최일이 훗날 그 땅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전쟁은 함흥부자인 전황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북한에 생활기반을 둔 채 남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힘겨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중부터 안무가로 인정받은 남한생활 1951년 부산피난시절 전황은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개소하여 전옥누님이 단장으로 있는 백조가극단과 무관하게 활동했다. 정인방이 전황을 찾아와 부산극장에서 공연할 무용극 〈처용랑〉의 마귀역할을 이인범(발레)이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한다고 대신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본도 없이 음악을 맡은 나운영의 집에 가 피아노곡을 듣고 안무하여 마귀옷을 입고 현대무용같은 발레를 추었는데, 안무를 잘했다는 평을 받았다. 1953년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춘앵 등이 주축인 여성국악동호회(여성국극의 효시, 1948년 창단)에서 활동하는 최승희 반주악사였던 박성옥을 따라 동래온천장에서 창극연습에 참가하여 유치진 작 창극〈가야금〉 초연 때 아쟁(박성옥으로부터 이미 배웠음)을 연주하였다. 그때 전황은 박성옥의 연주를 돕다가 한영숙의 춤 〈가야금의 노래〉를 보는데 안무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춤판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햇님창극단장 김주전이 한영숙에게 전황이 최승희 제자니 한번 시켜보라는 귀뜸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한영숙이 전황에게 안무해보라고 부탁해 인정받은 것이 오늘날까지 안무가로 자신감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성군무인 만큼 춤은 추지않고 안무에만 열중하여 여성국악동호회의 후신인 햇님창극단은 잘 나가게 되었고 전황은 안무가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작품 〈햇님달님〉에서 라이벌인 박귀희(햇님)·김소희(달님)가 노래하고 안무는 전황의 몫이었다. 국악을 듣는 귀가 있으니 다른 이가 일주일 걸릴 안무를 하루나 이틀에 완성했다. 동래온천장 공연은 자금이 넉넉해 신선놀음이었지만, 여성국극단이 예닐곱 개씩 생기다보니 서로 제살깎기식 경쟁을 했고 결국 해체를 거듭하다 국립창극단이 태동하게 되었다. 당시 출연료는 명창이 1만원, 악사는 9천원, 안무가는 6천원 정도 받았다. 돈을 벌게 된 23세 전황은 1951년 11월 이조판서를 지낸 집안의 딸 다섯 살 연하의 김봉선과 금정사에서 결혼하였다. 여성국극에 반한 동래여고 출신 김봉선이 햇님창극단 오디션에 뽑혀 무용수로 투입되면서 사귀다가 눈이 맞았었다. 처형이 예기 김강남월로 7세에 레코드를 취입한 천재소녀 명창이었다. 그가 소리한 뒤 순서에는 서로 무대에 나가길 꺼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당시 누님 전옥은 예술가가 일찍 결혼하면 신세망친다고 반대했었지만 결혼 후에는 처가살이를 했다. 첫아이는 출생 직후 죽었고 5년 후 태어난 전미례(52·서울전미례 재즈무용단대표), 죽은 딸의 이름 ‘미례’를 다시 붙였다. 전황의 2남2녀 중 맏딸 전미례만 춤을 물려받았다. 펄펄 나는 힘과 예술적 열정을 미국 재즈유학에 쏟았고 국내 재즈무용계 무용학 박사 1호를 기록했다. 6·25 전쟁 후 부산에서 북한 출신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 때 최승희 제자인 전황은 전옥의 신원보증으로 안무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인범, 송범은 활동하지 않았고, 김백봉도 북한출신의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조용했었다.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터전이 국극판이었다. 김백봉, 강선영 등도 여성국극단에서 안무했었다. 국극에는 오프닝춤, 상징춤, 경사춤, 피날래춤 등 적어도 너댓 가지 춤이 필요했다. 전황은 국극을 안무하며 창을 계속 들었기에 귀명창이 되었다.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창을 들으며 누구보다 빨리 안무했다. 50여년 이상 국악을 들으며 입으로는 안 되지만 손하고 가슴 속으로는 연주가 가능했다. 〈벌에 쏘인 꽃〉 등 수많은 국극과 창극을 안무했다. 대표작은 첫 작품인 〈가야금〉.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우륵을 따라간 가실왕과 그를 사모한 배꽃아기의 사랑이야기 자체가 건전해 마음에 쏙 든다고 했다. 무용작품도 전황류 〈부채춤〉, 〈장구춤〉, 〈소고춤〉, 〈장검무〉, 무용극〈황우와 우미인〉, 〈시집가는 날〉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시 명창 박귀희와 김소희는 형님아우 하면서 잘 지냈지만 서로 최고이고 싶어 했고, 서로 전황에게 하소연했었다. 박귀희의 명성이 더 앞섰기에 김소희는 늘 불만이었다. "내가 나이도 위고 소리도 잘 하는데 왜 밤낮 박귀희 다음에 김소희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박귀희는 스스로 김소희만큼 소리가 못하다는 걸 깨닫고 가야금병창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김소희는 판소리로 지정받았다. 북한출신이고 최승희의 제자라는 이유로 소외시켰지만 실력으로 춤을 인정 전황은 최승희 선생에게 배운 춤을 바탕으로 창작했으니 내 몸에서는 항시 최선생님의 춤냄새만 난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자 무용만으론 생활비가 되지 않자 영화사 일도 하고 백조가극단도 봐주고 돈이 되는 일이면 창극단 안무도 하는 등 최승희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춤실력과 안무력을 바탕으로 바쁘게 살았다. 또한 늘 북한콤플렉스가 있었다. 예를 들어 흰 의상과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 빨간색이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보자고 하여 누가 안무했느냐? 왜 빨강색 의상이 가운데로 몰리느냐? 꼬치꼬치 따져 마음대로 창작할 수 없었다. 또 남한 무용가들은 '이북에서 온 주제에 어디를 넘봐' 하는 식으로 질투하기도 했다. 부산피난시절 여성국극단 안무를 할 때 "전황이가 누구냐” 고 하더니 무조건 쇠고랑을 채운 적도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간 그에게 "왜 남한으로 넘어왔느냐”면서 간첩취급을 했다. 물론 매번 누나 전옥이 보증을 서서 풀려났지만 그 후로도 국가보안법으로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북한출신임을 숨겼지만 전황은 스스로 떳떳하게 밝히곤 하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김백봉과 남편 안제승도 종로경찰서에 불려갔으며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받았다. 올림픽 때 안무를 맡고 싶었는데, '전황이는 이북에서 왔다'며 그를 추천하지 않아 참여를 못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무용가들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행사안무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자리를 얻었다. 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는 실력 있다고 알아주었다. 한국민속예술단원 및 안무자로서의 왕성한 해외활동 1958년 국극의 전성기까지 안무가로 활동한 전황은 결혼 후 서울로 이주하여, 1963년 광화문에 신흥무용학원을 내었고, 체계적인 춤교육 덕분에 조교를 두 명이나 두고 지도하였다. 1963년 서울민속무용단 활동과 더불어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합창단, 무용단, 관현악단 등 300명의 단원들은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해체와 재창단을 거듭하며 예그린도 100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말기 멤버로 동참한 전황은 권려성의 후임으로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 및 안무·연출을 맡았으며, 1964년에는 명동국립극장에서 이틀 동안 제1회 춤 발표회를 가졌다. 이틀 공연은 대박이었다. 흥행사가 붙은 공연은 대전에도 초청됐다. 당시 김백봉은 필동에 연구소를 차렸고, 장추화의 제자 송범은 현대무용을 추었다. 그 후에도 1967년까지 매년 전황 민속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1967년 정일권 국무총리 때도 계속 민속예술단에서 활동했다. 1968년 한국민속예술단 지도위원 및 출연자로 멕시코 올림픽·일본 공연을 하였다. 송범, 김백봉, 김문숙, 전황 등과 함께 조택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들은 세계 각국을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 때 전황은 〈부채춤〉 〈농악〉 〈장고춤〉 〈무당춤〉 등 동적인 춤을 안무하고 추었다. 1970년 정부문화사절단 지도위원으로 일본 및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였고, 1971년 정부문화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레바논 일본 등 순회공연, 1972년 정부문화사절단 무용총감독으로 유럽·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24개국 순회공연, 1973년 문공부 파견 일본 신주쿠 고마극장에서 〈춘향전〉 안무와 국립창극단 〈배비장〉 안무를 하였다. 1976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문공부 파견으로 일본 도쿄국제극장 쇼치구가무단의 〈심청전〉을 안무하였다. 1977년 정부문화사절단 유럽 11개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8년 하와이이민 75주년 기념 한국민속예술단 연출·안무를 맡았으며, 1981년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공연 및 대예술제에 연출·안무로 농악을 올렸다. 이처럼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적 행사와 해외공연의 안무자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무용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흩어진 〈농악〉을 무대화한 주인공이 바로 전황이다. 한두 시간씩 치는 농악을 15분 정도로 압축해 많은 가락과 춤사위를 정리했다. 김덕수와 최종실 등 사물놀이패가 구성되기 전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좋은 점을 뽑아 50~60명이 오르는 무대농악으로 구성했다. 처음 선보인 건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공연에서다. 교방춤과 마당춤을 극장예술로 다듬으면서 극장양식의 변화를 주도했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과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한 전황 최승희 제자로 안무가와 무용가로 활동한 전황이 어찌하여 무용협회 활동을 하지 않고 국악협회로 발을 돌렸을까 의문이 든다. 1964년 한국국악협회 무용분과위원장을 맡고 14년 동안 국악협회 활동을 하다가 1988부터 1991까지 한국국악협회부이사장으로 활동한 배경도 무용계에서는 북한출신이라는 배타성, 남성이 남성춤을 추지 않고 여성춤에만 치중하는 모습, 성정체성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된 그는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하는 대한민국국악제를 협회 주최로 이끌어 오는 등 40여 년 동안 한국국악협회에서 역동적인 남성춤을 안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타악과 현악과 성악을 터득하여 국악계에서 활동한 것이다.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은 1973년 〈배비장〉 안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물론 여성국악창극단이 활동한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창극에서의 역할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어서 1999년 중국 베이징 국극공연 〈황진이〉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그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고법(鼓法) 이수자가 되었다. 고법은 창극단 시절 한일섭과 정철호로부터 조금씩 배워 연주에 참여했던 것을 인정받아 이수증을 받게 된 것이다. 2000년 창작민요극〈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 있었네〉와 창무극〈해상왕 장보고〉를 안무했다. 일본어능력시험 1급 자격도 땄다. 일본공연을 자주 가고 일본작품 〈제비〉도 번역할 정도였다. 2002년 문화재청 파견 한·일문화교류의 해 〈천년의 소리〉 일본순회공연 예술총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2004년 국립창극단 자문위원을 위촉받아 자문하였고,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로 10년을 출강하여 마지막까지 춤열정을 후학들에게 쏟았다. 그리고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의 대상으로 춤과 국악 생애를 증언하였다. 다만 장년 이후 춤을 많이 추지 않고 안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제자가 많지만 어려서부터 춤을 배워온 윤성주와 딸 전미례 등이 있고 말년의 제자로는 김지원, 백선희 등이 있을 뿐이다. 전황의 예술세계 전황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문하에서 사사했고, 1951년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과 안무연출을 맡는 등 정부 문화사절단으로 각국에서 '춘향전', '심청전'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한국민속예술단원과 안무자로 유럽 3회, 동남아시아 2회, 미국, 러시아, 중국, 중동, 일본 등 당시엔 한 번 나가기도 힘들다는 외국 공연을 수십 차례 다녔다. 덕분에 국민훈장인 동백장도 받았다. 1988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199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96~97년 국립중앙극장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무용계뿐만 아니라 국악계에서도 널리 업적을 남겼다. 전황이 남긴 예술혼과 예술철학은 몇 가지 굵직한 교훈과 한국공연예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첫째, 최승희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창작력과 뛰어난 안무력을 바탕으로 민간예술을 민족적 무대예술로 승화시킨 점이다. "저, 최승희 제자예요. 최승희! 최승희 무혼(舞魂)의 흐름이 제 춤에 들어 있다고요. 그 자부심 하나로 이 땅에서 타협하지 않고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살았습니다.”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던 최승희가 전통악기를 개량한 악기반주에 맞춰 민족무용과 국극을 안무하고 창작하던 것을 이어받은 전황은 안무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 ‘마당농악’을 ‘무대농악’, ‘민간춤’을 ‘무대춤’ 등으로 민족무대예술을 발전시켰다. 둘째, 북한출신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서 이념갈등 속에서도 남한예술가로 자리매김하며 본인만의 순수공연예술작품을 창작하였다. "북한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저를 보자고 하여 마음대로 창작할 수도 없었죠.” 때로는 쇠고랑도 채웠고,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간첩취급도 당하는 등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많이 받았으며, 북으로 넘어간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편견이 상존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운 고향마저 버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남한을 택했고, 굴하지 않은 신념으로 자신만의 예술혼을 살려보고자 각종 공연예술에 전념하였다. 셋째, 여성편향적 경향과 비중에 편향된 사조에 맞서 외롭게 역동적인 남성예술의 복원과 추구에 앞장서 남녀예술의 균형발전과 공존사상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최승희 선생께 남성춤, 여성춤을 확연히 구분해 배웠는데, 왜 남성들이 그리 여성스럽게 추는지‥‥‥‥” 여성춤은 곱고 이쁘지만 남자는 남자다운 춤을 추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살풀이춤, 입춤같은 춤을 춘 적도 없고 장검무, 소고춤, 장고춤, 농악춤 등 남성성이 강한 춤을 추고 가르쳤다. 혼자의 힘으로 대세를 역전시키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는 남성은 치마(여성)춤만 추지 말고 바지춤을 추어야한다며 남성예술과 여성예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일념으로 살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매방이 가장 춤을 잘 춘다고 했다. 60여년 친구이지만 전황은 남자가 여자처럼 춤추는 게 싫었다. 최승희 문하에서 수년 동안 남성춤과 여성춤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상이 골수에 박힌 그는 춤추는 남성들의 대부분이 여성화된 춤을 추는 게 못마땅했다. 그때부터 그는 무대가 좋지만 무대에 가급적 서지 않았다. 여성적인 춤을 추는 이들과 동일시되는 게 싫었다. 게다가 딸 전미례가 아버지의 성정체성과 취향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해 그때부터는 가끔 서던 무대마저 무대화장을 전혀 하지 않다가 전두환 대통령취임식 때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넷째, 한민족예술의 본질인 가무악(歌舞樂) 일체사상과 악무극(樂舞劇) 합체사상을 표방하고 심어주었다. "국악을 알아야 무용을 창작할 수 있어! 특히 장단의 귀가 뚫려야 산조를 들을 줄 알아야 춤을 만들 수 있지!” 우리 민족은 원래 국악따로 무용따로가 없이 악가무 일체의 예술적 특성을 지닌 민족이다. 전황은 이러한 민족예술과 춤의 본질적 특성을 올곧게 지닌 예술가였다. 서구예술의 전공분화시대에서 소외됨을 무릅쓰고 총체예술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였다. 전황이 한국예술계에 남긴 것 한국 신무용의 핵심이 최승희에서 비롯됐기에 스승 최승희에 대한 기억을 소상히 간직한 전황의 자부심은 귀하고도 올곧았다. 최근까지 남한에 생존해있는 최승희의 대표제자로는 김백봉과 전황뿐이었는데, 유일한 남자제자인 전황선생님의 작고는 신무용시대의 대표적인 적통자이며 전승자의 인맥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평생 최승희의 춤사상을 실천하고 끊임없이 남성춤을 추구해온 근대무용의 산증인이었으며, 무대농악의 창시자이고 국극과 창극에서도 영원한 안무자로 자리매김하여 국악계의 수장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등 한국 근대예술사의 한 획을 긋고 떠났다. 끝으로 전황은 예술계의 간디라는 생각이 든다.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 평화주의자이였듯이, 전황은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스타집안의 피를 이어받았고 당시 세계적인 한국무용가 최승희의 남성제자였기에 한국무용계에서 스타반열과 직책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여러 정체성 문제로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도 묵묵히 세태에 복종하지 않았고, 이념전쟁의 희생양이었지만 본인만의 색깔과 예술혼을 불사르며 국가, 사회, 문화계에 무언의 항거를 보여주었다. 국악계로 발을 돌려 커다란 족적을 남기면서 끝까지 무용계를 탓하지 않았다. "전황류 소고춤, 전황류 검무, 전황류 쌍검무, 전황류 농악을 만들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혼이 들어가 있다는 거죠. 남자는 남자답게 씩씩하게 ! 그래서 저는 절대로 무대에 오를 때 화장하지 않았습니다. 미례가 나의 성정체성에 의심을 품을 때부터 완전히 화장을 그만두었죠.”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아쉬움도 남는 법이어서 전황선생님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떠오른다. "피리 등 관악기만 못해보고 타악과 현악은 웬만큼 해봤지! 그런데 아쉬움이라면 거문고 산조를 못해본 것이 가장 한이 맺혀! 술대로 현을 드르렁 긁는 소리가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멋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수상〉국무총리표창(68년), 문화공보부장관 표창(69·70·71·72년), 국민훈장 동백장(73년), 문화공보부장관 감사장(81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공로패(82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98년), 문화재청 공로 감사장(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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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아리랑의 날' 다시 불러보는 '사할린아리랑'10월 1일 '아리랑의 날'이다. 아리랑학회는 지난달 새로 탄생한 사할린아리랑 가사를 사할린동포들과 전국아리랑전승단체에 전달했다. 지난달 9월 19일 정선아리랑보존회(이사장 김길자)가 주최 주관한 제8회 정선아리랑 가사짓기대회에서, 사할린에 살고 있는 사할린 2세 김경순.박영자씨가 특별상을 수상했다. (사)정선아리랑보존회(이사장 김길자)가 주관하는 이 행사는 매년 응모작 모두를 모음집으로 출판해 정선아리랑 가사의 현재화와 전국적 관심을 축적해 오고 있다. 김길자 이사장은 "특히 올해에는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사할린 동포들, 국내 영주 사할린 동포, 탈북 새터민 등도 참여를 할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 이는 전체 아리랑의 현재화에도 기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이번 응모작은 심사 도중에도 현장 접수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할 정도로 전국적 관심을 받고 있었다. 심사에 오른 작품 수는 응모자 일반부 132명 312수, 학생부 45명 53수이다. '정선아리랑 가사짓기’는 올해 8회 째로 전국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전국 유일한 아리랑 가사짓기대회 행사이다. 사설은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가서 80 여년 동안 만나지 못한 육친의 뼈아픈 이별의 한과 '이산의 이산', '디아스포라(이산)'를 노래했다. 다음은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국어반 김경순(77세)씨가 지은 정선아리랑 가사이다. 자신들의 부모가 일제에 속아서 왔고 나는 왜 사할린에 태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부모들은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나서 바닷가 언덕애 올라 하루종일 배를 기다렸다고 한다. 하루가 가고 한달이 가고 한평생을 사할린 동토의 땅에서 묻혔다고 한다. 아리랑의 정서를 첫번째로 찾는다면 아마도 사할린아리랑을 들 수 있다. '시대의 노래' 아리랑의 존재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후렴) 아우라지 물가에 봄꽃놀이 눈에 삼삼한데 왜놈에 속아 어린 아들 두고, 사할린에 징용 왔소 사시 삼철 탄가루 눈발에 꽃가루 날리는데 모질고 배고픈 눈물의 징용살이 그 누가 아나요 전쟁 끝나면 여량 땅에 돌아갈 걸 믿었지 한달만 있으면 아들한테 갈 것을 철썩같이 믿었지. 밤이면 라디오 켜 두고, 혹시나 우릴 찾을려나 숨죽여 듣던 세월은 꾸역꾸역 쉰 해가 넘었네. 고향의 큰배 기다리다 병들어 세상 뜬 부모들 가엾어라 부모등골 쓰라리고 쓰라리네, 애타던 자식들도 애닮퍼라 다음은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한국어교사 박영자(73세)씨가 지은 정선아리랑 사설이다. 사할린동포특별법이 발효되어서 누구든지 조선사람들은 1세가 사망해도 2세 3세는 조국에 귀환할 수 있게 해달라고 노래하고 있다. 무릉도원 정선을 놔두고 우리네 부모 사할린 징용왔네 말문이 터지고 귀가 열릴때 알았네요 우리네 조국땅 나는야 사할린2세 한국인 우리네 부모 조국은 남조선 어릴때 저산 너머 가면 우리네 남조선이라고 알았네 이제는 80년이 흐르고 흘러 나도 할머니 되었네요 말문이 열린 손자들이 우리는 조국에서 못사나요 가보지도 못한 조국이 잘사는 나라 되었네 이제는 자랑스런 조국 세계인이 가고싶은 조선땅 그리운 조국이 언젠가 우리를 품에 안아줄까나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사는 사할린2세 김경순(갈리나김)시와 박영자(갈리나박)씨는 지난 해 2021년 2022년 KBS 한민족체험수기에서 각각 대상을 수상했다. 이 사설은 10월 1일 '아리랑의 날'에 경기도 양주에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이 살고 있는 율정마을 사할린아리랑보존회(최나타샤)에 전달되었다. 앞으로 무대에서 이 사설을 노래로 다듬어서 부를려고 한다고 전했다. 현재 알려는 사할린아리랑은 사할린1세 정성애 할머니가 지어서 부른 것과 새고려신문 공모전에 당선된 정태식씨가 지은 사할린아리랑이 음반과 무대화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할린아리랑제, 문경아리랑제, 청주아리랑제, 왕십리아리랑제, 공주아리랑제 등에서 정성애 할머니 장남 원명운(서천 영주귀국사할린동포회)씨가 부르기 시작하면서 각 지역 아리랑단체에서 불려지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사할린한국교육협회 부회장인 공노원 여사 손녀 신마이야(당시 12세)와 신아리나(당시 5세)가 2018년 사할린아리랑제와 2019년 문경새재아리랑제에서 '사할린아리랑'을 무반주로 불러서 첫 막을 열어서 큰 화제가 되었다. 지금도 유튜브에 검색하면 바로 그 장면을 감상할 수 있다. 지난 2021년 12월 23일 외교부에서 주관한 서울 정동1928 아트센터에서 김부겸 국무총리 참석 하에 개최된 '사할린동포법 제정 및 영주귀국 기념식'에서 신아리나가 아리랑으로 첫 무대를 열었다. 이 장면은 전세계 방송을 타고 동포사회에 방영되었다. 이날 70여 년만에 조국의 땅을 밟은 사할린 동포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어린 소녀가 부른 아리랑이 어루만져 주었다. 이 날 손녀가 부른 아리랑을 보면서 공노원 여사가 흘린 눈물을 잊을 수 없다. 박영자씨는 "나의 4대 가족사의 디아스포라가 담긴 이 사할린아리랑이 책으로 묶어서 나온다고 하니 기쁘다. 기록으로 남겨진다고 하니"라고 당선소감을 전했다. 김경순씨는 "작년에 만든 사할린아리랑 가사가 비공식적이지만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님에게 부탁을 드렸다. 직접 불러서 녹음을 해달라고, 그런데 음반에 담게 되어 가끔 행사 마당에서 확성기를 통해 아리랑을 들을 수 있다. 올해 지은 이 사할린아리랑도 같이 불려졌으면 좋겠다. 우리의 디아스포라의 아픔이 담긴 사할린아리랑을 역사에서 기억해달라"라고 전했다. 이번 공모전에도 매신저 역활을 해준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은 "공모전이 알려져도 나이드신 세대들은 인터넷 사용을 몰라서 누군가 도와주어야 응모를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이 안타깝다"라고 전했다. 전국사할린귀국통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사할린아리랑은 사할린 한인의 존재를 알리는 노래이다. 더불어 사할린아리랑을 통해 국민들에게 사할린동포특별법이 널리 알려지기 바란다."라고 격려했다. 내년에도 사할린 동포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디아스포라 아리랑, 사할린아리랑이 새록새록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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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화엄사 다음달 6~8일 화엄문화제1500년 역사를 지닌 전남 구례 화엄사가 10월 6일부터 8일까지 화엄문화제를 개최한다. '천년의 화엄, 전법의 길을 열다'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 문화제에는 비건버거 맛보기, 걷기 체험,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개막일인 6일에는 화엄사 비건 버거 출시와 시식, 화엄사 자일리톨 스톤 출시 행사를 진행한다. '꽃스님'으로 알려진 범정스님과 함께하는 구례 사찰 명상순례 길 걷기대회도 열린다. 구례군민 외 참가희망자는 50명을 화엄사 누리집에서 선착순으로 모집한다. 1년에 딱 한 번만 볼 수 있는 국보 제301호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 이운식이 진행된다. 올해 처음으로 누리집을 통해 일반인의 참여 신청을 받는다. 춤·음악과 함께 의식을 올리는 괘불재도 봉행한다. 밤에는 평창동계올림픽 음악감독을 역임한 김주연 화엄사 음악감독의 해설과 함께하는 클래식 야외 음악회가 펼쳐진다. 둘째 날에는 화엄사의 근현대 중창조인 이산당 도광 대선사 원적 39주기와 도천당 도천 대종사 원적 12주기 추모제를 봉행한다. 이날 오후 7시부터는 화엄문화제의 백미인 화엄음악회가 개최한다. 퓨전 국악을 주제로 소리꾼 장사익과 인도에서 온 고전무용팀, 비보이 공연팀 등이 무대에 오른다. 마지막 날 오전에는 화엄사 원로 종설종사 49재를 한 뒤 오후에는 화엄사 홍보대사 마리엘과 함께하는 제3회 어머니의 길 걷기대회가 이어진다. 화엄사 주지인 덕문 스님은 "사찰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곳이 돼야 한다"며 "화엄사는 모든 중생이 함께 살아가는 동업중생(同業衆生)이라는 마음으로 문화제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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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985년 서울예술단의 평양공연 자료’남북적십자회담의 합의에 따라 남북간 고향방문단과 함께 이뤄진 공연 교환 공연이다. 1973년 평양에서 이뤄진 제7차 적십자 회담 이산가족 성묘단 교류를 북한 측에 제안한 결과이다. 1985년 서울예술단의 평양공연(평양대극장)이고 북한 평양예술단의 서울공연(중앙국립극장)이었다. 이 공연에서 서울예술단은 마지막 순서를 평양시민과 함께하는 ‘전원합창 아리랑’을 연주했고, 평양예술단은 ‘관현악 아리랑’을 연주하였다. ‘전원합창 아리랑’은 새롭게 편곡하고 가사를 새롭게 하였다. "육천만 하나로 뭉처서 간다”와 같이 한민족의 통합을 반영한 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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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 삶과 역사 기록한 사진전, 이예식 작가지구촌동포연대는 일제 강점기 러시아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됐다가 돌아오지 못한 한인 1세대와 후손의 삶을 담은 사진전을 개최한다고 3일 밝혔다. '사할린,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주제로 오는 12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갤러리 인텍스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이예식(74) 사할린 새고려신문 사진기자가 찍은 작품으로 꾸며졌다. 부친 고향이 옥천인 한인 2세인 이 기자는 대학 졸업 후 구소련 매체들의 지역 통신원으로 활동하다가 1999년부터 새고려신문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부친이 탄광으로 강제 징용된 후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 2세다. 2016∼2017년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한인들의 생활상과 영주귀국 모습 등을 담아 사진전을 열었고 사진집도 발간했다.지난해에는 사할린주기자협회 추천을 받아 사할린주가 사회공헌자에게 포상하는 기념배지를 받았다.이 기자는 "사할린 한인은 일제 강점기에 끌려와 패전 후 남겨졌고, 냉전 시대에는 귀향길이 막힌 채 힘들 삶을 살아오면서도 정체성을 지켜왔다"며 "이들의 삶을 역사로 남긴다는 사명감으로 힘닿는 데까지 기록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전시에서는 구소련 시절에도 한민족 풍습을 지켜왔던 사할린 한인들의 생활상과 영주귀국 모습 등이 소개된다. 지구촌동포연대는 12일 개막일에는 작가와의 대화 시간도 마련되었는데. 사할린 태풍 경고로 한국 도착이 미루어져 15일 오후 4시로 연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지구촌동포연대 관계자는 "1990년 러시아와 수교를 맺기 전까지 귀향길이 막힌 채 힘든 삶을 살면서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온 한인들의 존재를 알리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이산의 아픔을 소개하는 전시"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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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박물관 '두 얼굴의 평화, DMZ' 특별전 개최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이 6·25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두 얼굴의 평화, DMZ' 특별전을 오는 10월15일까지 선보인다. 1953년 7월 27일 경기도 북부의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된 것을 기념하고,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의 참상과 정전협정, 그리고 정전협정의 결과로 만들어진 비무장지대(DMZ)에 대해 조명해보는 특별기획전이다. 행사는 오는 10월15일까지 진행된다. 전시는 지난 2020~2021년 문화재청·경기도·강원도가 합동으로 진행한 '한반도 비무장지대 실태조사' 성과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비무장지대 내에서 발굴·수습한 영웅들의 유품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제1부 ‘끝나지 않은 전쟁’, 제2부 ‘두 얼굴의 DMZ’, 제3부 ‘내일을 위한 기억’, 제4부 ‘DMZ 실태조사 성과 순회사진전’ 등 네 부분으로 나눠진행된다. 제1부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는 6·25전쟁과 정전협정을 다룬다. 6·25전쟁에서 사용한 대표적인 무기인 M1 소총과 '따발총'이라고 불리는 소련제 슈파긴 기관 단총, 전쟁 때 뿌려진 삐라, 유엔군이 돌아갈 때 기념으로 가져간 아리랑스카프 등을 전시한다.또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정전협정 본문(복제본)을 볼 수 있다. 정전협정서는 유엔군 대표와 북한군·중공군 대표가 서명, 정전협정서 원본은 미국과 중국 북한에 있다. 제3부 '내일을 위한 기억'에서는 6·25전쟁에 전투부대와 의료지원을 해준 국제연합군의 22개 국가의 희생을 기억하는 국내의 기념비를 소개한다.이와 함께 70년 전 정전협정 지도를 통해 사라진 마을과 문화유산에 대한 정보도 전시한다. 비무장지대가 탄생하면서 사라진 마을은 총 2개 도, 9개 군, 35개 면, 116개 행정리와 401개의 부속마을이다.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된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전쟁·분단·이산의 아픔을 노래한 대중가요, 전쟁을 다룬 영화, 판문점과 비무장지대를 기록한 사진집, 다시 가 보고 싶은 '그리운 금강산' 관련 유물과 자료, 비무장지대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실태조사 자료 등도 전시한다. 제4부는 'DMZ 실태조사 성과 순회사진전'이다. DMZ 실태조사 때 촬영한 가장 최근의 사진들을 경기도박물관 갤러리에서 따로 선보인다.2009년 국방부 의뢰로 최초로 휴전 이후 비무장지대 기록 사진을 촬영한 박종우 작가의 다큐멘터리 사진도 전시된다. 이 사진들을 통해 70년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무장지대 안의 감시초소와 전방을 수색하는 병사 모습, 그 곳에 서식하는 식물과 조류, 포유류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무장지대의 원시적 아름다운 자연 풍경 아래에는 남과 북이 겪은 전쟁 잔해와 아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전시 기간 중에는 정전협정 70주년 학술포럼과 전시연계 전문가 특강 등 다양한 행사도 열린다. 전시연계 프로그램으로는 통일부가 제작한 ‘DMZ 메타버스, 사라진 마을’이 상설돼 있다. 6.25전쟁 이전 DMZ에 있었던 400여 개의 마을 중에서 연천 고랑포리․항동리, 철원 외촌리․유정리, 양구 문등리, 고성 대강리․사비리 등 큰 규모의 마을을 메타버스로 구현한 프로그램이다. 경기도박물관 관계자는 "비무장지대 땅 밑에 지뢰와 폭탄이 숨어있고 전사자의 유해와 유품, 문화유적과 사라진 마을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며 "이들을 무심히 덮고 회복해가는 자연생태계의 모습을 통해 DMZ의 내일, 한반도의 평화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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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한국전쟁과 아리랑(上)한국전쟁 3년 1개월 2일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위 38°선 전역, 소련의 지령과 중국의 지원으로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였다. 약 5년간의 체제에서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냉전 속의 이 체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후자는 수립이 되자마자 군사력을 확충하며 소련과는 ‘조소군사비밀협정’을, 중국공산당과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준비했다. 이에 따라 중국 공산군에 있던 조선인 2만5천명이 북한군에 인도됨으로서, 13만명이 전선에 배치되었다. 우월한 전세를 갖춘 북한은 통일을 내세워 선전포고(宣戰布告)도 없이 남침을 했다. 이렇게 전 38선상에 남침함으로서 촉발된 전쟁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에 UN 결의에 따라 국제사회가 개입하게 되었고, 미7사단 주력부대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성공함으로서 서울을 수복하고 이어 9일만에 평양을 점령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교착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이 때부터 UN군 등에서 제한전쟁으로 휴전이 제기 되기에 이르렀다. 이 전쟁으로 한민족은 너무나 큰 손실을 보았다. 정신적 피해는 제처 두고라도 인적 물적 손실은 물론, 많은 이산가족 발생 같은 고통은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기에 이르렀다. 우선 인적 손실은 어느 전쟁보다 컸는데, 국군은 140여만 명, 북한은 약 329만 명, 유엔군은 약 15만 명의 손실을 보았다. 결국 남북은 무려 520만 명의 희생을 낸 것이다. 전쟁 피해, 희생은 이뿐만이 아니다. UN 참전군들의 희생도 크다. 참전국은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공 룩셈부르크 16개국이 유엔군으로서 약 190만 명의 전투병을 파병했으며, 인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가 야전병원, 병원선 등의 의료지원을 통해 참전했다. 이들의 인명 희생도 막중했다. 또한 많은 포로들의 발생도 그 처리로 갈등을 겪었다. 한민족이 남북군과 중공군에 동족임에도 편입되었고, 16개국 UN군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포로 교환 문제는 휴전회담 기간 내내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 포로 중에는 강제로 징집되어 많은 투항병이 발생하였고, 한국군 포로가 재 강제 징집 되어 북한군이 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중공군 포로 중에는 송환을 거부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UN '포로교환문제소위원회'와 '국제적십자조사위원회'는 곤경에 처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세 가지 문제로 급진전하게 되었다. 하나는 북한 지역에 전염병의 발발한 사실이고, 둘은 1952년 12월 유엔총회에서 120일간 설득하여 체코·폴란드·스웨덴·스위스 4개국으로 자유의사에 따라 선택하게 하자는 합의를 하였다. 마지막은 1953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의 사망이었다. 이런 경과로 휴전은 급진하였다. 드디어 1951년 7월 미국의 릿지웨이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 김일성과 평더화이 중공군사령관이 개성에서 회담이 시작되어, 군사분계선 설정, 세부사항 일괄타결, 전쟁포로 문제 합의와 협정 체결이 된 것이다.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협정을 맺어 전쟁은 중지되었다. 북한과 중공군 대(對) UN군 측의 미국이 대표하여 협정에 서명함으로서 휴전이 되었다. 3년 1개월 2일의 전쟁은 휴전 체제로 들어 간 것이다. 이로서 포로교환 등의 여진이 남았지만, UN군은 해체되어 참전 군인들은 각국으로 귀국하였다. 남북한은 전선에서 군인들과 무기를 철수하였다. 그리고 전쟁 복구에 들어갔다. 처참한 동족상잔 한국전쟁은 귀국 참전 군인들에 의해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 결과로 ‘한국은 전쟁의 나라’, ‘한국은 고아의 나라’, ‘한국은 아리랑의 나라’ 같은 인상비평적(印象批評的) 표현들이 회자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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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에도 '동두천아리랑'이 있다이병일/전 사할린한국교육원장 나는 교직 생활 중 12년을 왕십리 근처 세군데 학교에서 보냈다. 그리고 장학사로는 성동광진교육지원청에서 또 2년 근무했다. 그러한 인연이었을까. 무대에서 왕십리아리랑을 부르게 되었다. 지난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개최한 양주에 영주귀국하신 사할린 동포와 함께한 아리랑학교 및 위문공연에 이어 25일 개최된 제2회 동두천아리랑제 무대에 서게 되었다. 왕십리아리랑보존회(회장 이혜솔)의 초청으로 구한말 재야학자 매천 황현이 남긴 매천야록의 '아리랑을 사랑한 명성후'라는 부분을 재현하는 상황에서 고종황제 역활을 맡게 되었다. 난생 처음 곤룡포를 입고 임금님이 되어 황후와 함께 무대에서 '왕십리아리랑'을 부르게 되었다. (오늘 서울 도성 밖 동쪽 십리에 유람을 나선 임금이 되어 명성황후와 함께 무대에서 백성들과 함께 아리랑을 불렀다. 잠시 가문의 영광을 누렸다.) 이러한 아리랑 인연은 올해 3월까지 사할린한국교육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에서 기증한 공연용 한복들을 받아 사할린아리랑무용단에 전달해 드리면서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아리랑연합회 주관으로 매년 개최되고 있는 사할린아리랑제, 사할린 방문과 관련하여 사할린아리랑추진단 기미양 단장과의 인연도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요청으로 동두천아리랑제 무대에 섰다. 특히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레파토리 '사할린아리랑'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었다. 오늘 발표되는 동두천아리랑은 동두천아리랑보존회가 8년 전부터 발굴하여 복원한 아리랑이다. 북한강 수계를 따라서 전래되고 있는 토속민요 '이담어러리'이다. 동두천아리랑보존회(회장 유은서)가 주관하는 동두천아리랑제는 시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지역 다양한 쟝르의 국악인 단체와 타 지역 아리랑보존회의 공연들이 어우러져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농악대의 길놀이와 지신밟기로 시작한 무대는 동두천아리랑보존회와 함께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안성아리랑보존회 및 여러 단체의 다채로운 공연과 노동요 합창, 창작무용, 변검과 인형극, 가요 등이 잘 어우러져 시간가는 줄 몰랐다. 한수이북 경기지역 아리랑을 대표하는 아리랑축제로 발전 및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동두천아리랑제에서 발표한 동두천아리랑 사설에는 지역성과 역사성이 녹아있다. 주제가 확실한 축제였다고 본다. 또한 지역 공동체 간의 협력이 두드러진 '공동체의 노래'로 우뚝 서리라고 본다. 성황리에 축제를 마치고 동두천을 대변하는 대표음식 1호 부대찌개로 저녁식사 뒷풀이를 하면서 지난 1월에 사할린 에트노스 아동예술학교에 전달한 이담농악의 '태극상모' 이야기를 꺼냈다 동두천 공연 관계자 분들이 동두천 이담농악단 김경수 단장과 사할린한국교육원장이던 나와의 인연을 상기하였다. 스쳐간 인연 조차도 시간을 이리 저리 돌다가 언젠가 손을 잡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모험과 도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아리랑축제에 참여하여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알리는 일에 기여했으면 한다. 그리고 이산의 노래! 사할린아리랑의 슬픈 혼백의 역할도 해내고 싶다. 슬픈 틈새의 섬! 눈물의 섬! 사할린에서 3년을 살아온 인연은 결코 가볍지 않다. 코로나 사태로 한국과의 문화교류가 끊겨지자 나는 비전문가로서 사할린에서 동포들에게 탈춤과 아리랑, 소고춤을 배워주고 무대에서 발표까지 수행했다. 작년에는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에서 최고 대상을 받은 사할린한국교육원생 김경순 여사(73세)의 시 '눈물의 섬, 사할린'을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 하여 음반까지 만들어서 배포했다. 김여사가 '칠곡산' 선율에 가사를 입혀서 불러 달라는 요청을 받고 한국에서 작업을 해서 사할린에 가서 보내 드렸다. 나의 목소리로 부른 노래가 녹음이 된 것이다. 평소 수업시간에 노래를 부르면서 한국어 교육을 하는 편이라서 부탁을 하신 것이다.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역사를 표현한 사할린아리랑의 보급을 통해 동포애를 나누고 싶다. 퇴직후 나에게 역할이 주어진다면 남은 시간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평생 국가에서 받은 혜택을 다시 돌려드리고 싶다. 우선 아리랑의 역사와 맞물린 가사들도 이해하고 명료하게 가슴에 담아야겠다. 민중들이 입었던 무명 바지 저고리 한복부터 준비해야겠다. 코로나로 인해 사할린에서 동포애를 충분히 나누고 오지 못한 나의 새로운 임무와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귀한 참여의 기회를 내주신 여러 관계자 분들께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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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한마당이병일/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원장 (현 석관중학교장) 사할린한국교육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지 4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서울의 중학교에서 일하고 있지만, 나는 현지 사할린 동포들과 여전히 아침마다 여러 SNS에서 인사를 나눈다. 시시각각 소식들은 점심시간이나 오후 퇴근길에서 열어 보고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하트를 보낸다. 지난 11일 주말 아침 사할린 동포들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의 초청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사할린에서 귀국하고 처음으로 사할린 동포들을 만난다는 설레임을 안고 영주귀국동포들이 사시는 경기도 양주 율정마을에 도착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주관하는 "사할린동포와 함께하는, 찾아가는 아리랑 학교"가 열린 것이다. 서울에서 양주까지 2시간 이상 운전을 하면서, 지난 3년 간 임기를 마친 사할린한국교육원 시간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그 중 많은 추억들 중 '사할린아리랑'은 기미양 대표님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3년 전 7월 중순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과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님을 처음 만났다. 사할린 비자 갱신차 일시 귀국했다가 제4회사할린아리랑축제 행사를 준비하는 문제로 종로에서 만난 것이다. 현재는 전쟁으로 잠시 중단 된 상태이지만 2016년부터 매년 아리랑연합회는 사할린주한인협회와 공동주최로 사할린에서 크고 작은 행사와 공연을 수 차례 지속적으로 주관해 오고 있는 아리랑공동체이다. 국내외 55개 아리랑전승단체와 연구단체로 구성된 순수 시민운동단체이다. 그후 일시 귀국 때마다 국악신문사에서 보내주는 한복과 태극선 부채, 태극상모(이담농악), 아리랑음반,국악음반 등을 사할린 한민족예술동포단체에 전달했고, 아리랑학회에서 주관하는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에 수강하기도 했고, 돌아가서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아리랑 특강과 새해 첫날 우리말방송에서 아리랑의 역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기미양 대표와는 아리랑 관련 자료와 행사 소식을 이메일을 통해 주고 받고, 화상통화로 10월에 내린 사할린 첫눈 소식을 건내 주어서 국악신문 포토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특히 유즈노사할린스크 주에서 지어준 '아리랑누각'과 '아리랑공원' 건립 소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러 국제적 사정으로 매년 사할린아리랑축제 및 아리랑 예술공연 단체가 준비하는 사할린 방문은 무산되었다. 나는 사할린에서 탈춤과 소고춤, 사할린아리랑, 밀양아리랑, 어부놀이 등 민속춤과 아리랑배우기 등을 통해 사할린 동포 및 현지인과 교류를 하였다. 특히 2022년 3월 KBS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년' 행사에 사할린 동포들 50명과 함께 특별초청 되어 동포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후 2022년 KBS방송 한민족수기공모전 수상자 인터뷰, 한민족방송에 두 차례 출연해서 사할린 동포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특히 KBS한민족수기공모전 참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한글교육에 힘썼다. 미디어 매체를 통해 사할린 동포의 존재와 이산의 역사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니 지나가시는 어르신들의 러시아어 대화가 들려서 참으로 신기하고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자꾸 말 걸고 싶은 기분이랄까. 문경에서 도착한 대형버스에서 앰프와 악기, 다듬이, 박스 등이 리어카에 실려서 공연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사할린 어른들도 함께 손수 나르시고 계셨다. 떡과 수박 등 다과회까지 준비를 해오셨다. 공연 식전 행사에서 인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서 행사가 있게 되면, 1세대 어르신들께 큰절을 드리던 습관이 있어서 양주 율정마을 동포 1세대분들께 바닥에 엎드려서 큰절을 올렸다. 이어 "아직도 3년간 살다 온 사할린 기억이 생생해서 자다가도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 글을 쓰며 추억한다. 그리고 영주귀국 신청 전에 부모가 사망하시면 영주귀국 신청을 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2세대 어르신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잠시 가슴이 울컥해져서 머리 속이 먹먹해졌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닫혀진 대강당 문이 오늘 3년만에 처음 열게 된 것이다. 한쪽 면은 대형 사이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비치는 공간이라서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무덥지는 않았지만,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은 관계로 관람객이 늘어나고 공연이 이어지면서 다소 습기가 올라가는 느낌이 있었다.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사할린에서 살다오신 어르신들께는 부담이 되는 기온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사할린에서 체질이 형성된 분들이라 한국의 무더운 여름은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늘 이맘때는 사할린에 돌아가서 그리운 가족들과 함께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9월 말 즈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시고 했는데....이제는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3년간이나 한국에서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계신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회장:이만유)가 준비한 공연 프로그램은 모두 아리랑판이다. 율정마을 어르신들로 구성된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의 '사할린아리랑' 합창으로 첫 막을 열었다. 이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의 '왕십리아리랑', 동두천아리랑보존회의 '동두천아리랑'이 불려졌다. 2부는 문경에서 오신 40여 명의 아도위 회원들이 준비했다. 아도위합창단과 아도위연주단이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 홀로아리랑 등 다양한 아리랑을 연곡으로 불러 주시고, 문경새재아리랑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하모니카 연주단이 트롯트를 선사했다. 동포들이 무대에 나와서 우리 전통 춤사위와 러시아 민속 춤사위로 춤을 추기 시작해서 신명을 높여 주었다. 트롯트에서 빠른 비엔나 왈츠, 불루스 등을 망라한 춤판이 이루어졌다. 러시아에서 태어나신 분들은 노래보다 춤을 더 즐긴다. 우리가 노래방을 좋아하는만큼 그들은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휘날레 춤판에는 많은 어른들이 춤을 추시고 기뻐하셨다. 코로나가 때문에 너무나 오랜만에 모여서 추어보는 춤이라고 하시면서....이러한 자연스런 파티 풍경은 사할린에서 근무하는 동안 너무나 낯익은 어울림이어서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운 사할린 추억으로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문경시민들은 동포 분들께 드릴 정성이 담긴 선물도 듬뿍 가져 오셨다. 문경시장이 보낸 아리랑 책자, 문경특산물 오미자 와인, 오미자김 등을 뒷풀이에서 풀어 놓기도 하셨다. 직접 만든 생강조청을 준비하신 문은자 여사님의 정성이 대단하다. 기미양 대표님은 사할린아리랑축제추진단장으로서 '아리랑'을 매개로 현지 사할린 동포와 전국 여러 지역의 사할린 영주귀국동포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계신다. 영주귀국 사할린동포 분들의 성함과 얼굴, 모스크바에서부터 사할린에 사는 친인척 관계에서 겹사돈 관계까지 거의 알고 계신다. 그동안 사할린 원로 교육자 고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안간, 인천 등 에 사시는 많은 사할린 사람들을 만나서 강제동원과 가족사에 대한 기록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대표님과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2017년 사할린 이산의 역사가 다큐로 방영되고, 국내외 사할린 동포들에게 KBS한민족체험수기 공모전 참가를 널리 알려오고 계신다. 사할린 동포들의 디아스포라의 아픔이 공중파와 출판을 통해 소개되는 성과를 내고 있다. 매년 대상 수상작은 사할린 동포들의 이산의 고통이 담긴 가족사이다. 작년 대상 역시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글학교 수강생 김경순(77세) 어른이 수상했다. 2019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일간 개최된 '서울아리랑페스티발'에서 '사할린아리랑무용단과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대상과 금상을 받았다. 현재 사할린아리랑앙상블(단장:박영자), 오늘 만난 양주 율정마을 사할린 동포로 이루어진 사할린아리랑보존회 합창단이 수상한 것이다. 당시 하바롭스크아리랑보존회 게나김 단장도 초청되어 무대에서 '카레이스키아리랑'을 부녀가 같이 불러서 주목을 받았다. 우리는 흩어진 한민족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아리랑을 매개로 활발한 개방과 교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코로나 판데믹의 여파과 전쟁으로 인한 문화적 교류의 중단으로 인한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아리랑을 매개로 문경시민들과 사할린이 연결된 오늘 이 시간은 새로운 시작의 의욕을 신선하게 일으키는 날이다. 순수 시민운동단체로서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의 활동이 놀랍다. 이만유 회장의 특강에서 정선아리랑.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처럼 온 국민이 문경새재아리랑을 부르게 될 것이라는 진정성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먼 길을 와 주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동두천아리랑보존회, 한편 이혜솔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장님은 병원 입원 중에도 양주까지 오셔서 공연이 끝나고 바로 병원으로 재입원하셨다. 사할린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는 사할린아리랑보존회 및 율정마을 어르신들, 오늘 사할린과 문경의 만남을 순조롭게 이어주신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 그리고 자리를 빛내주신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님과 부회장님의 동행 등,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런 귀한 다음 만남의 시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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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번째 왕십리아리랑제 축하합니다"왕십리아리랑연구보존회가 주최주관하는 제13회 왕십리아리랑제가 지난 3일(토) 성동문화회관 3층 소월아트홀에서 열렸다. 왕십리아리랑이 본조아리랑과 함께 국내외에서 불리고 있다. 이혜솔 회장이 국내 고려인들이 모여사는 광주, 인천 등과 영주귀국 사힐린 청소년과 동포들에게 사할린아리랑, 아무르아리랑을 널리 알려오고 있는 성과라고 볼 수 있다. 특히 2019년 사할린아리랑제 참가 이후, 보존회 회원들이 매달 정기적으로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후원을 하고 있다. 동포들에게 한복을 모아서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다. 말 그대로 '자발적 전승단체'이다. 성동문화원 김종태 원장은 "매년 열리는 왕십리아리랑제 행사는 올해로 13회를 맞고 있으며 전통음악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이사장께서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재해석하여 또 다른 모습의 아리랑을 선보이고 알리고 보급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축사를 전했다. 성동구청 정원오 청장은 "왕십리아리랑연구보존회 이혜솔 이사장님은 아리랑 전승자로서 서도소리 이수자인 동시에배뱅이굿 이수자로서 활발한 국내·외 공연을 통하여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과 민요를 널리 알리고 계십니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효(孝)사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꾸준히 활동을 해오고 계시는 이혜솔 이사장님과 보존회 회원분들께 감사와 경의를 보냅니다."라고 축사를 전했다. 성동구 남연희 시의원은 "성동구로 시집을 오신지 47년이 되시는 이혜솔 회장이 우리 왕십리를 널리 알리고 있는 왕십리아리랑을 널리 알려오고, 오늘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보훈가족을 초창해 주셔서 더욱 의미있는 날이 되었습니다"라고 축하했다.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현 석촌중학교장) 원장은 "13번째 왕십리아리랑축제를 축하합니다.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하는 3회 사할린아리랑축제 참가, 한복보내기, 특히 고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산의 노래. 사할린아리랑을 널리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축사를 전했다.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은 이에 대한 답사로 "앞으로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보급하고, 왕십리아리랑을 통해 성동구가 정이 넘치고 살기좋은 곳이라고 널리 알리겠다고 전했다. 그리고 내년 보훈의 달 6월에도 이 무대를 준비하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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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왕십리아리랑제, 제주아리랑부터 사할린아리랑까지지난 3일 왕십리아리랑보존회가 주최주관하는 제13회 왕십리아리랑제가 성동구 소월아트홀에서 '디아스포라 아리랑'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6월 보훈의 날을 맞이하여 보훈 가족 50여 명과 성동구민 등 300여 명이 객석을 채워 성황리에 성료되었다. 45명이 무대에 오른 이번 공연은 1부 이산의 노래, 2부 해원의 노래, 3부 상생의 노래로 구성되어 7개 지역 아리랑과 경기민요, 전통춤으로 구성되었다. 특별출연으로 김명남 명창이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를 선사했다. '왕십리아리랑'은 순수 창작곡이다.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장 이혜솔 명창이 작사하고, 양금 연주자 윤은화가 작곡했다.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 아리랑고개를 서로 함께 넘어요. 서울의 왕십리 우리 사는 곳. 개나리 화창한 꽃동산이래요.사랑과 희망이 넘쳐 흐르는, 서울의 서울은 우리 왕십리래요. 우리 서로 벅찬 가슴 마주하면서. 손잡아요 어깨동무 함께할래요. 한양도성 동쪽 십리 응봉산 정기. 세세년년 우리 삶터 희망의 샘터. 살곶이벌 응봉기슭 응방의 옛터. 역사문화 오래오랜 우리의 터전. 인류유산 아리랑은 우리의 자랑. 슬기로운 매사냥도 인류유산이래요." 첫 막은 '왕십리아리랑으로 열었다. 1부에서 '이산의 노래' 사할린아리랑은 소극으로 엮어내어 대일항쟁기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가면서 가족들과 생이별을 당하는 고난과 슬픔을 아리랑에 담아낸 이산의 아픔을 형상화 하였다. 내가 왜 왔나 내가 왜 왔나 우리 님 따라서 내 여기 왔지 우리 조선은 따뜻한데 그 땅에 못가고 내 여기 사나 우리 영감님은 어데로 갔나 나만 혼자 두고 자기만 갔네 강제징용의 땅 사할린에서 한인 1세대들이 고국을 그리며 부르는 망향의 노래 ‘사할린 아리랑’의 한 대목이다. 3연은 사할린에서 다시 일본땅으로 이중징용 가는 대목이다. 우리님 따라서 사할린에 왔는데, 다시 나만 혼자 두고 일본 해저 탄광으로 끌려가는 이산의 고난을 고하고 있다. 2부 '해원의 노래'에서는 서귀포아리랑보존회 유재희 회장과 박옥희가 제주아리랑을 선보였다. 이때 제주해녀의 복장을 한 장경숙(제주아리랑연구회장)의 제주 해녀의 고난과 역경을 몸짓으로 표현하며 제주아리랑을 함께 불러서 관객의 몰입도를 끌어내었다. 이어 김용자, 최순이, 박연춘이 상주아리랑, 진도아리랑. 강원도아리랑을 연곡으로 불러서 신명과 흥을 돋구웠다. 관객들이 후렴을 따라서 부르면서 손뼉을 치고 발을 굴리면서 추림새를 던져주었다. 얼쑤, 좋다! 3부 '상생의 노래'에서는 대일항쟁기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한 호국선열을 추모하는 의미로 만든 '아무르아리랑'이 소극으로 펼쳐져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무르아리랑 넘어간다.(후렴) 원수하고는 같은 하늘아래 살수가 없어, 팔걷고 뛰어나와 의병되었네, 동양평화 하자하자 외치는 소리 하늘땅 온세상 진동하누나 다섯발 내디뎌 도적 쓰러지니동양평화 대역사 시작되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아무르아리랑) 이 아리랑은 이혜솔 회장이 2018년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열리는 안둥근의사추모제에 한국대표로 초청되어 헌정한 의병아리랑이다. 국내 거주하고 있는 광주 고려인문화원 및 고려인합창단,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이 사는 인천, 김포, 양주 등에서 사할린아리랑과 함께 알려오고 있는 의병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오고 있다.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원들이 소극으로 만들어서 무대화 하여 레파토리화 하고 있다. 성동구 거주하는 한 보훈가족(75세)은 "보훈의 날을 맞이하여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해주는 '아무르아리랑'이 가슴에 와 닿는다. 주말이라서 마침 손자들과 같이 와서 더욱 의미가 깊다. 감사하다"라고 이회장의 손을 두손으로 잡아주었다. 휘날레가 끝났는데도 관객들이 계속해서 '앵콜'을 외쳐 주었다. 주말이라서 가족과 함께 온 모습이 화기애애하다. 전국아리랑공연연합회에서 축시를 보냈다. "우리 왕십리아리랑은 아리랑은 역사와 민족을 노래한다. 아리랑은 우리가 사는 땅을 노래한다. 왕십리아리랑은 서울의 역사를 노래한다 왕십리아리랑이 탄생한지 5년 이제 ‘아리랑의 아리랑’으로 자리한다 왕십리아리랑은 오늘의 우리 아리랑이다 구아리랑 긴아리랑 본조아리랑 정선아리랑 왕십리아리랑은 서울의 아리랑이다 이혜솔과 그들은 왕십리아리랑 전승자들이다 발표회를 하고 축제를 펼친다 제주도에서 정선까지 또 사할린까지 동포들과 외국 손님들과 우리들과 함께한다 아리랑의 역사를 아리랑의 위상을 아리랑의 세계화를 추동하는 막내 아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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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사 ‘신통일아리랑 평화축제’, 아리랑 얼쑤!천주평화연합 주최, 신통일아리랑 평화축제가 19일 오전 경북 풍기에 위치한 금강사에서 개최했다. 대한불교도법황종 금강사와 (사)한국종교협의회 등이 함께 아리랑 한마당을 통해 평화통일을 염원했다. 이번 행사에는 이현영 UPF 한국회장, 대한불교조계종 팔공총림 방장 임담의현 대종사, 대한불교도법황종 종정 혜경 대종사, 대한불교도법황종 총무원장 도봉스님, 전법주사 노형 대종사, 대한노인회 김동진 상임이사, 세계불교도연합 총재 도룡국사, 박성만 경상북도의회 의원, 김주영 영주시의회 의원을 비롯하여 UPF의 평화대사, 평화운동가 약 300여명이 참석했다. 또한 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도 참석했다. 행사를 주관한 UPF는 UN경제사회이사회 ‘포괄적 협의 지위’를 가진 글로벌 NGO로써 국내에서는 17개 광역시도 및 232개 시군구에 지부를 두고 활동하고 있다. ‘신통일아리랑’에서 펼쳐진 아리랑은 6월 1일 ‘의병의 날’과 7월 27일 정전 70주년을 의미화 한 의병아리랑을 중심에 배치하고 7개 지역 아리랑보존회가 전승하는 토속아리랑을 함께했다. 경상도 지역 '대구아리랑'에서부터 사할린에서 불렸던 '사할린아리랑'까지 7지역 단체에서 12종의 아리랑을 선보였다. 첫 무대는 경산아리랑보존회가 준비한 산뜻한 ‘화전놀이아리랑’으로 열고, 휘날레는 탁월한 보편성을 지닌 '본조아리랑' 대합창으로 여몄다. 2006년 창립한 경산아리랑보존회(이사장:배경숙)은 경산아리랑을 전승하고 매년 경산아리랑체와 경산아리랑전국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영남지역 구전민요와 함께 경산아리랑을 스토링텔링 작업으로 완성한 소극은 전통에 무게를 실은 무대화를 통해 현대적 계승에 힘쓰고 있다. 2003년 창립한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이사장:곽동현)는 2003년부터 매년 8월 15일 광복절에는 대구아리랑제(통상20회)를 개최해오고 있다. 영남 지역에 25개 지부와 함께 영남아리랑축제 및 대구아리랑전국경창대회(통상 20회)를 개최하고 있다. 2012년 창립한 (사)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이사장:기연옥)은 기우만 의병장 직손으로서 문헌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춘천의병아리랑과 최초 여성의병장 윤희순을 기리는 '윤희순의병아리랑' 등을 소극과 뮤직컬로 무대화 하여 국내외 순회공연을 통해 널리 알리고 있다. 2019년 서울아리랑패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2011년 창립한 (사)영천아리랑연구보존회(이사장:전은석)는 영천아리랑을 전승하고 매년 영천아리랑제와 영천아리랑전국경창대회(통산10회)를 개최하고 있다. 일년에 100여 차례 경로당 위문공연을 해오고 있다. 2005년 배경숙의 '구미아리랑' 발표 후 창립한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이사장:임규익)은 2009년부터 경상북도과 구미시 후원으로 매년 구미아리랑제 개최, 2018년 이후 허위 의병장을 기리는 구미미의병아리랑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2016년 창립한 (사)왕십리아리랑보존회(이사장: 이혜솔)는 경기서울 지역 아리랑을 전승하고 있다. 아리랑, 왕십리아리랑, 사할린아리랑, 아무르아리랑, 아리랑코로나, 연꽃아리랑 등을 스토링텔링 작업을 통한 무대화에 힘쓰고 있다.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지도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2020년 창립한 동두천아리랑보존회(회장:유은서)는 휘날레에서 본조아리랑을 선창했다. 6월 25일 동두천아리랑제를 열 예정이다. (사)아리랑연합회는 이번 금강사에서 펼친 아리랑 한마당을 시작으로 신통일한국을 추동하는 힘의 노래가 아리랑임을 다양한 곳에서 전개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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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됐다‘4·19혁명기록물’과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18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이날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6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등재가 결정된 두 유산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4·19혁명기록물’은 1960년대 봄 발발한 학생 주도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1019점의 기록물이다.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위를 시작으로 3·15 부정선거 이후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까지 전개 과정을 기록한 자료들이 포함됐다. ‘4·19혁명기록물’은 독재정권에 맞서 비폭력 저항으로 민주주의를 이룬 역사적 기록으로 의미가 크다. 특히 제3세계 최초로 성공한 비폭력 시민혁명으로 유럽의 1968년 혁명, 미국의 반전운동, 일본의 안보투쟁 등 1960년대 세계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친 기록유산으로서 세계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받는다.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1894~1895년 조선에서 발발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185점의 기록물이다. 당시 부패한 지도층과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며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민중이 봉기했다.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각 고을 관아에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민·관 협력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했는데, 이는 19세기 당시 전 세계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들었던 신선한 민주주의 실험으로 평가받는다.동학농민혁명 지도자였던 전봉준(1855~1895)의 법정 심문 기록이 담긴 ‘전봉준 공초’,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 나주 감옥에 갇혔던 한달문(1859~1895)이 모친에게 쓴 편지 등은 당대의 사상과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번 등재로 조선 백성들이 주체가 돼서 자유, 평등,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기 위해 했던 노력의 중요성을 인정받게 됐다.문화재청은 2017년 대국민 공모를 통해 두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준비했다. 그러나 유네스코가 제도개선을 위해 2017년부터 약 4년간 세계기록유산 등재 프로그램을 중단하면서 두 기록물의 등재도 미뤄졌다. 2021년 재개 후 다시 추진해 이번에 등재할 수 있게 됐다.이로써 한국은 훈민정음(1997년)과 조선왕조실록(1997년), 직지심체요절(2001년), 승정원일기(2001년), 조선왕조의궤(2007년), 해인사 대장경판과 제경판(2007년), 동의보감(2009년), 일성록(2011년), 5·18 관련 기록물(2011년), 난중일기(2013년), 새마을운동기록물(2013년), 한국의 유교책판(2015년),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2015년),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2017년), 국채보상운동기록물(2017년), 조선통신사기록물(2017년)을 포함해 총 18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됐다.문화재청은 "기록문화 강국으로의 위상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면서 "앞으로도 세계적으로 보존해야 할 가치 있는 기록유산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확대해 나가고 우리나라의 우수한 기록문화를 국내외에 널리 알릴 계획”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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